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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분단 70년, 대한민국 다시 하나로] “아! 백범∼ 이시영 설득에 이승만정부 참여 직전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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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3-03 21:11:09 수정 : 2015-03-03 22:5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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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광복, 다시 빛을 보다 - 나의 해방 70년 ① 이종찬 前 국정원장에 듣는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심훈, ‘그날이 오면’)

광복은 부활이었다. 자주 독립의 희망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흘러 넘쳤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냉전의 대리 전쟁터로 변했다. 아름다운 우리 강토는 쑥대밭이 됐다.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났다. 그렇게 70년이 속절없이 흘렀다. 광복의 기쁨에 더덩실 춤을 췄던, 전쟁과 분단의 세월을 온몸으로 견뎌낸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고 있다. 세계일보는 광복 70년의 의미와 교훈을 얻기 위해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각계 인사의 증언을 게재한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의 손자인 이종찬(79) 전 국정원장은 “해방 정국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우남 이승만 박사가 협력했다면 지금처럼 보혁 갈등이 심화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이 전 원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이 전 원장의 작은할아버지)의 끊임없는 설득 덕에 백범은 어느 정도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할 마음을 굳혔다”는 비사를 공개했다. 그는 “이시영 선생은 ‘내가 부통령직을 맡고 있지만 나이(80)가 너무 많다. 이제 당신이 하라’는 식으로 백범을 설득했다. 그러던 와중에 백범이 암살당했다. 안타까울 따름이다”고 말했다.

1999년 김대중정부 초대 국정원장 시절의 이종찬. 국정원 청사 정문 앞에 세운 광개토대왕비 복제비(이 전 원장 오른쪽)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종찬 전 원장 제공
이 전 원장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데다 임정 요인들이 중국에서 귀국했을 때 미국 유학파들을 중심으로 한민당이 조직돼 그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면서 “하지만 임시정부에게는 국민적 지지가 있었던 만큼 이를 바탕으로 한민당과 화합을 하는 것이 옳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 백범은 다들 알다시피 외골수였다. 백범 입장에서는 귀국하자마자 ‘일제 때 해먹던 놈들이 또 해먹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백범과 한민당은 틀어졌다”면서 “백범은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 없이 우국충정만 있었다”고 말했다. 그 시점에 이시영의 설득으로 백범이 남한 단독정부에 참여하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암살당했다는 것이다. 김구를 임시정부 주석으로 추대한 이시영은 김구의 멘토 같은 존재다. 이 전 원장은 “김대중정부 시절 김 전 대통령과도 해방 정국에 대한 토론을 많이 했는데 김 전 대통령도 ‘당시의 정치인이었다면 백범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라고 권했을 것’이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이 전 원장과의 인터뷰는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 접견실에서 진행됐다.

조남규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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