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직은 ‘우당 이회영(사진) 실기(實記)’에서 우당 일가의 만주행을 극찬했다. 백사 이항복을 비롯해 영의정만 셋을 배출한 이회영 가문은 삼한갑족(三韓甲族)이었다. 나라가 멸망하고 이른바 권문세가 다수가 일제의 작위를 받고 친일파가 되었을 때 이회영 일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해외로 망명했다. 서양식으로 표현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다.
이회영 형제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사 비용을 위해 경작하던 위토까지 처분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달 초 덕수궁 중명전에서 열린 ‘우당 이회영과 6형제’ 전시회 특별강연에서 “우당 가문은 현재 명동 인근에 1만여평 토지를 보유했다. 굳이 계량해 보자면 오늘날 2조원은 넘는다”며 “그 외에도 개성, 양주 등 전국에 소유한 토지 266만여 평과 드러나지 않은 재산의 가치를 합하면 10조원에서 수백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모두 썼다. “우당 집의 밥을 얻어먹지 않은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우당의 6형제 중 다섯째 이시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중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대소가와 권속 6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넜지만 해방을 맞아 고국 땅을 밟은 이는 20명 남짓이었다.
이우중 기자 lol@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