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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분단 70년, 대한민국 다시 하나로] “임정 요인들 고국 땅 밟았을 때 환영객 단 한 명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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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3-03 21:12:07 수정 : 2015-05-19 13:4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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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광복, 다시 빛을 보다 - 나의 해방 70년 ① 이종찬 前 국정원장에 듣는다
김대중정부의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79) 우당장학회 이사장은 광복을 중국 상하이에서 맞았다. 그의 조부인 이회영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직후인 1910년 12월 아들 이규학(李圭鶴·이 전 원장 부친) 등 가솔 60여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회영 일족은 만주 등을 거쳐 1919년 상하이로 거처를 옮겼고 1936년 4월29일 그곳에서 이 전 원장이 태어났다. 이 전 원장은 지금도 자신을 농담조로 ‘상하이방(上海幇)’이라고 부른다. 그는 상하이에서 광복의 소식을 들었다. 이 전 원장 가족은 46년 5월 꿈에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다. “배가 상하이 부두를 지나 서해를 건너 제주 근방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산이란 것을 봤다. 그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 전 원장은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봤으며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정부의 주역으로 활동하며 현대사의 산 증인이 됐다.

중국 상하이 시절 이종찬 전 원장(앞줄 왼쪽)과 그의 어머니, 누나
―광복을 어떻게 맞았나.

“미국이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1945년 8월9일)한 다음 날이었다. 집에 돌아와 잠시 머물었던 아버님(이규학)을 누가 찾아왔다. 꼭 베트남의 호찌민처럼 빼빼 마른 사람이었다. 그분이 바로 정화암(鄭華岩) 선생이었다. 정 선생은 항일전선에서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많은 일본 고위간부와 친일파를 처단한 대담한 분이었다. 그러나 외모로는 가냘프기 짝이 없는 분이었다. 아버님과 정 선생은 골방에 들어앉아 무언가 숙의를 했다. 그때 이미 아버님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고문 끝에 청각을 거의 상실한 몸이었다. 그러므로 자연 필답으로 밀담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두어 시간의 대화가 끝난 후 정 선생은 바람처럼 훌쩍 떠났고, 아버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자! 이제 우리도 곧 고국에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정 선생은 이미 일본의 패망을 알고 아버님과 여러 가지 사후 문제를 논의한 것이었다. 내가 골방에 들어가 보니 재떨이에 종이를 태운 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정 선생이 아버님을 찾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후 며칠 안 되어 목 매도록 기다렸던 일본의 패망의 날이 왔다. 나의 부모님은 1910년에 중국에 망명한 이래 내내 객지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조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국이었다.”

1945년 11월5일 환국 길에 상하이를 찾은 임시정부 요인들. 당시 아홉살이던 이 전 원장(원 안) 뒤로 백범 김구
―광복 직후 상하이의 풍경은.

“일본군이 물러나니 제일 먼저 한인교민회가 조직됐다. 하지만 교민회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없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일단 돈이 없지 않나. 쫓겨 다니다 보니 인맥도 넓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에 붙어서 장사를 하고 심지어 아편을 팔던 사람들까지도 앞장서서 한인교민회를 만들어 돈을 내는 등 표변했다. 아버님은 ‘그 사람들끼리 노는 것’이라며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가족도 나름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만끽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집에 많이 몰려왔고 아버지의 즐거워하는 모습도 자주 보여 ‘이게 해방이구나’ 싶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광복군 선견대가 상하이에 들어왔다. 광복군 선견대는 기존 교민회를 인정하지 않았고 새로 교민회가 구성됐다. 여기에는 아버님도 참여했다.”

1974년 주영 대사관 참사관 시절, 부인 윤장순씨와 함께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 길에 상하이에 들렀다. 기억나는 일들을 얘기해 달라.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을 다시 찾았지만 국제 정세는 우리에게 즉각적인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버님은 끊임없이 충칭의 임시정부와 통신을 하였지만 사후 정리할 것이 있으므로 귀국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뿐이었다. 1945년 10월이나 되어서 임시정부 요인 일행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배려로 그의 전용기편으로 상하이까지 왔다. 상하이에 있었던 일가들, 교포들은 밤을 새워서 태극기를 만들고 환영 준비에 바빴다. 상하이 비행장에서 우리는 임정요인 일행을 맞이했다. 나는 당시 백범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작은 할아버지인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유림 등 여러 선생들을 만났다. 임정 요인들이 상하이에 머물다가 마지막으로 작별하고 조국으로 돌아가시는 전날 저녁 가족들은 모두 모였다. 당시 김구 주석의 연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김 주석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대통령 나사복(羅斯福·루스벨트)이가 영국 수상 구길(球吉·처칠)이를 만나서 조선독립을 확약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젊은이들이 모두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김구 주석이 영어를 모르니깐 미국 대통령이나 영국의 수상 이름을 한국식으로 부른 것이 우습다는 것이었다.

1945년 11월5일 상하이 공항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을 마중나간 이종찬 전 국정원장(앞줄 오른쪽, 왼손에 태극기를 든 소년) 일가. 후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는 이시영 선생(앞줄, 중절모에 지팡이)이 아들과 조카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고 있다.
우당기념관 제공
김구 주석은 희망에 찬 말을 남겼다. ‘이제 여러분들이 조국에 돌아오면 옛날 조국이 아니라 민주적인 나라, 행복한 나라가 여러분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우레 같은 박수로 그분의 연설을 환영했었다. 김 주석의 주변에는 쟁쟁한 요인들이 모두 배석했었다. 30년간 임시정부를 지키신 이분들이야말로 장차 한국을 지도해 나가실 어른들이고, 모두가 하나같이 내 눈에는 바위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불과 5년 후에 대부분이 북한군에 의하여 납북되어 비명에 가실 줄이야….

1986년 국회 외무위원 시절 참석한 삼일절 행사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이후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미국이 충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땐 비행기가 미군 비행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충칭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임시정부 자격으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라고 했다. 결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가 왜곡된 첫 번째 단서라고 볼 수 있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교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이 김포 비행장에서 고국 땅을 밟았을 때 환영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1988년 이시영 부통령 동상 옆에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군은 연합군 자격으로 참전하지 않아 임시정부가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광복군을 조직해서 대일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훈련하는 도중 원자폭탄으로 전쟁이 일찍 끝났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국내 진공작전을 펼칠 수 있었지만 그 전에 종전이 돼버렸다. 그래서 미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들어와서도 푸대접을 받았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 집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중국 상하이에서 맞은 광복의 순간을 회고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해방 정국의 이승만 박사를 어떻게 평가하나.

“정치적 안목과 정보력에 있어서는 역대 대통령을 통틀어 이승만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정치고문인 미국의 로버트 올리버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국제정세를 파악했다. 올리버는 편지를 통해 소련, 북한의 동향을 상세히 알려줬다. 당시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진주하자마자 인민위원회를 조직해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정부를 세우지 않았다면서도 사실상 정부가 할 일을 한 셈이다. 이때 이승만은 ‘통일이 되기엔 이미 늦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주장한 ‘정읍 발언’도 이 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현재 이 박사가 정권 욕심 때문에 정읍 발언을 했다고 매도하는 말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시점에서 ‘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위에서 밀고 내려오겠구나’ 하는 경계심이 낳은 발언이라고 본다.”

―백범과 이승만이 화합했더라도 분단은 불가피하지 않았나.

“그렇다고 본다. 이미 소련이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세우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불가피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보혁 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았을까. 요즘 백범 노선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그의 노선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당시 백범이 시도한 남북협상은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공산주의 노선과는 이미 타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김일성이 백범을 이용하려 했다고 보는 게 맞다.”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와 함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승만은 ‘정부 수립 대통령’이지 건국 대통령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국회의장으로 직접 대한민국 국회 개회사를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리 민국은 기미년(1919년)부터 시작됐다. 민국 연호는 기미년으로부터 기산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지만 최근 나오는 ‘건국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임시정부부터 따진 게 아니지 않나. 따라서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를 한다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어떤 뜻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는지 모르고 주장하는 것이다. 국회 개회사뿐만 아니라 관보 등에서도 이승만은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봤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초 “친일파 주도로 이뤄진 대한민국 건국으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불의(不義)가 정의(正義)를 눌러온 역사”라고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그런 평가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 김 전 대통령과는 이 주제로 놓고 토론을 많이 했는데 김 전 대통령도 ‘당시의 정치인이었다면 백범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라고 권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중국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오쩌둥(毛澤東)을 평가한 ‘공칠과삼(功七過三)’을 말하고 싶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초기의 이승만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인의 장막에 둘러싸이고 권력에 취하면서 말로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분명 공도 무시할 수 없다.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나는 박정희를 나쁘게 보지 않는다. 유신 등의 엄혹한 시절이 있었지만 공도 따져야 한다. 이후의 권력들도 마찬가지다. 권력뿐 아니다. 모든 역사 평가를 편협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파 인명사전이 4000명 이상을 친일파로 분류한 것은 과하다는 생각이다. 참고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친일파 명단은 7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친일파 기준의 적용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당시의 계급에 따라 선을 긋는 것은 역시 잘못된 일이다. 행적을 평가해서 친일파 여부를 가려야 한다. ”

―친일파의 범위를 너무 넓게 잡았다는 의미인가.

“행동이 얼마나 악질적이었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의암 장지연 선생 같은 분까지 친일파에 포함하면 민족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무조건 친일 명단에 넣고 본다면 ‘독립운동가가 소수고 친일파가 많았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게다가 일본이 이것을 두고 ‘친일파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한국도 식민지배를 바랐다는 뜻이 아니냐’고 역논리를 펼 수도 있다.”

1992년 한·영의원친선협회 회장 시절 영국 찰스 왕세자로부터 훈장을 수여받는 장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방식을 놓고 외교독립론, 무장투쟁론, 실력양성론이 충돌했다.

“세 가지 노선이 서로 이질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특히 외교독립, 무장투쟁 노선은 같이했어야 옳았다. 예를 들면 아일랜드 독립운동은 IRA(아일랜드공화국군)와 신페인당이 함께 움직였다. 신페인은 IRA의 정당조직으로 외교교섭과 무장투쟁을 병행했다. 무장 없이 외교만 하자는 것도 문제고, 외교로 무엇이 되겠나 하면서 경시하는 입장도 문제다. 그러다 보니 양쪽 노선 모두 아무 것도 안 됐다. 외교와 무장이라는 두 개의 바퀴를 만들어 같이 돌렸어야 했다. 실력 양성도 중요하다. 다만 실력 양성을 친일의 변론으로 삼는 것은 안 된다. 주체적으로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어야 한다. 실력 양성이 잘못하면 일제와 협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당시 셋 모두를 적절히 배합하는 리더십이 없었다는 점이 아쉽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소회는.

“올해는 광복회가 생긴 지 50년째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최근 광복회 50주년 행사가 열렸다. 광복 70주년인데 광복회 창설 50주년이라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그 20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나. 해방되고 3년 동안 미 군정의 통치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전쟁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광복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해야 할 인물들이 학살당하거나 끌려간 뒤 이름 없는 산하에 묻혔다. 이런 비극을 바로잡으려면 역사가 바로 서야 한다. 독립운동을 했던 위인들은 대부분 삼대가 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중에 나라가 다시 위기에 빠지면 누가 저항하려 하겠나. 광복회가 할 일은 이런 절망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후손들에게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는 것이 먼저다. 친일파 후손들은 대한민국이 1948년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1919년 3·1 독립선언을 통해 최초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다고 밝혔고 그 선언이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이 의지를 이어나가는 것을 광복회의 지상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대담=조남규 사회부장, 정리=이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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