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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난 유적지, 선조들의 문화를 말하다

입력 : 2013-06-13 10:12:01 수정 : 2013-06-13 1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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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건천 통일신라 도시 유적…동서·남북 축 도로 10여곳 확인
서울 강남 수서동 왕릉 관련 터…대모산 기슭에 68m 대형 석축
수백, 수천 년간 땅속에 잠들어 있다 모습을 드러내는 유적지는 많은 것을 웅변한다. 건물터·축대·기와 가마터·배수로 등의 흔적과 출토 유물은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의 실체를 복합적으로 전해준다. 그것이 왕실·도시 등에 관련된 것이라면 유적지가 웅변하는 것은 과거의 당당함과 화려함이다. 최근 잇달아 발굴된 통일신라·조선시대 유적지가 그렇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통일신라시대의 도시는 10m에 가까운 도로를 갖추고 있었고, 수십m의 제방으로 경계를 삼았다. 조선의 왕실은 여러 채의 건물과 최고급 기와로 선왕(先王)의 능을 조성해 권위를 세웠다.
경북 경주시 건천읍 방내리, 모량리 일대 통일신라시대 도시유적에서 확인된 석축제방. 제방은 도시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도시유적의 당당함

“신라의 전성기에 경중(京中)에는 17만8936호, 1360방(坊),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역사서 ‘삼국유사’는 신라가 절정을 맞던 무렵의 도시를 위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학계는 이것이 잘못 적힌 것이 아니겠느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도로에 의해 경계 지어진 방은 360개가 존재했을 것으로 본다. 삼국유사는 엉뚱한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

경북 경주시 건천읍 방내리·모량리 일대에 통일신라시대 도시 유적은 이런 사료와 학계 통설 사이의 괴리를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영남문화재연구원이 경주 동해남부선 연결선 건설공사 구간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도로·우물·담장·적심(積心) 건물지·제방시설 등을 갖춘 도시유적이 확인했다. 도로는 폭이 5∼8m로 10여 곳에서 확인됐으며 모두 남북·동서 축으로 이뤄져 있다. 도로에 의해 구획된 하나의 방(坊)은 120m×120m의 규모로, 방 내에는 담장과 우물, 적심 건물지로 구성된 가옥이 조성돼 있었다.

또 대천(大川)과 인접한 북쪽 경계 지점에서는 동서로 연결된 길이 30m, 폭 5m의 석축제방이 발견돼 도시의 경계를 확인할 수 있다. 유물로는 수막새를 비롯한 토기, 청동접시, 수레굴대, 탑상전(塔像塼), 치미(용마루 장식기와), 청동거울 등이 출토됐다. 특히 우물주변 진단구(鎭壇具: 건물을 지을 때 땅의 신에게 제사 지내고자 지하에 묻는 매장품)로 이용됐던 청동접시의 바닥에는 ‘왕(王)’자가 새겨져 있었다.

도로와 건물지의 중복이 많고, 건물 조성 시 이용된 축성토에서 5세기 유물이 다수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5세기경부터 마을이 조성돼 6∼7세기를 거쳐 8세기경에 경주 왕경과 같은 도심으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발굴지역 일대는 신라 6부의 하나인 ‘모량부’의 옛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연구원 측은 “이번 조사로 경주시내 외곽지역에서 방제(坊制)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돼 신라 왕도의 발달사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며 “(연구 결과에 따라)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종대왕이 처음 묻힌 ‘영릉’으로 추정되는 유적지에서 발굴된 가마터를 전문가들이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세종대왕 처음 잠든 ‘영릉’ 추정터 발견

서울 세곡2 보금자리주택지구 건설 예정지인 강남구 수서동 540번지 일대에 대형 축대시설이 발견됐다. 인근에는 기와가마터 4기가 있었고, 배수로 시설도 밀집된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유적지는 이곳에 조선 초기 최고급 건물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발굴을 담당한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강문화재연구원은 이곳이 조선 초기 왕릉의 원찰 혹은 능침으로 추정했다.

조사 결과 강남구 대모산 서쪽 기슭에서 남북 방향을 따라 68m 이상에 이르는 대형석축이 드러났다. 석축 단 위에는 현재까지 건물터 6개 동과 건물터 중앙을 차지한 박석(납작한 돌)과 벽돌을 깐 마당, 아궁이와 배수로 시설 등이 발견됐다. 조사 구역 인근에 또 다른 석축시설과 건물터 등의 흔적으로 볼만한 대지가 있다는 점, 왕릉에서나 쓸 법한 최고급 기와 등의 유물이 출토된 점 등으로 미뤄 이 구역에 들어선 건물터는 높은 권위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지를 둘러본 전문가들은 태종의 헌릉 혹은 지금까지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던 세종이 처음 묻혔던 영릉과 관련된 유적지가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전문가 검토 회의에 참석한 심정보 문화재위원회 매장분과 위원장은 “기와를 생산하던 시설과 생산한 기와를 실제로 쓴 건물터, 기와를 폐기한 곳까지 완벽히 갖춘 이런 유적은 유례가 드물다”며 “더욱 철저한 발굴조사와 관련 문헌조사를 통해 이 유적의 성격을 구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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