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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널 시대 편파보도 못 피해
‘공영방송’ 용어, 착시·오해 불러
신뢰는 의존·편향성으로 이어져
누구든 진실 독점 할 수는 없어

1946년생 나의 아버지는, 뉴스는 늘 KBS만 보셨다. KBS만이 진실을 보도한다고 믿으셨다. 공영방송이니까. 아버지는 세상을 KBS적으로 보셨고, 당신의 삶을 KBS적으로 해석하셨다. KBS는 아버지의 가치관이자 정체성이 되었다.

아버지는 KBS가 지시하는 후보자에게 투표하면서도 그것을 ‘자유’라고 여기셨다. 당신이 민주시민이라는 자긍심은 누구보다 먼저 투표장으로 향하게 했다. KBS를 신봉하는 아버지는 공익과 공공선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시는 것처럼 보였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KBS 뉴스를 보지 않으셨다. KBS가 바뀌었다는 걸 내색은 하지 않으셨다. 정권이 바뀌고 KBS 사장이 바뀌었기 때문에 보도의 관점과 이데올로기가 바뀌었다는 것도 모르는 척하시는 듯했다. KBS에 의해 형성된 관점이 KBS에 의해 무너지는 것이 불편하셨던 거다. ‘믿음’을 철회하지는 않으셨다. 믿음의 철회는 당신 인생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의리도 KBS가 가르친 가치였는지 모른다. 믿어 왔던 것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아버지의 신의는 순박하고 집요했다.

KBS에 대한 아버지의 인지부조화적 믿음은 두려움 때문이었을 거다. 취약한 당신이 기댈 수 있는 진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진실이 필요한 사람은 ‘진실’의 외피를 한 것에 의존하게 된다. 아버지는 진실에 기대고 싶었기 때문에 편향될 수밖에 없었고, 자유를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유를 찾기 위한 길에 나서지 않으셨다. 당신의 벗어날 수 없는 가난에 대해서도 자신을 책망했기 때문에 불평 없이 성실한 국민으로 평생 사셨다.

지난 14일, 박민 KBS 사장이 취임했다. 그는 불공정 편파 보도에 대해 사과했다. 불공정 보도 사례로 든 건 네 가지였다. KBS가 편파 보도를 한 것이 네 건밖에 없을까. 저널리즘은 사실이 아닌 것들에 항상 노출돼 있다. 어떤 방송국이든 편파 보도와 불공정 기사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다매체·다채널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담론이 담론을 복제하고 복제된 담론들이 서로 기생하고 다시 하이브리드로 재탄생하는 자본주의 담론 시장에서 정확하고 유일한 진실은 부재한다.

진실은 다면적이다. 어떤 방송국이든, 어떤 권력이든 진실을 독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영방송’이란 용어는 마치 진실이 따로 존재하고, 그 진실을 드러내는 방송국, 혹은 그래야 하는 당위와 책임이 있는 방송국이 따로 있다는 환상을 만든다.

‘단독 보도’라는 말도 남발된다. 이때 ‘단독 보도’는 마치 ‘단독 상품’이란 말처럼 들린다. 이 물건(보도)은 여기서만 살 수 있다는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다. 진실은 배타적으로 판매되는 것이 아니다. ‘단독 보도’라는, 진실에 대한 독점을 강조하는 용어는 뉴스를 상품화하고 저널리즘 시장논리를 더 강화한다.

시청률은 양가적이다. 시청률은 시청자의 인정 수준을 나타내지만, 뉴스 제작의 시장 논리에도 흡수된다. 시청률에 따른 인센티브 또한 뉴스의 상품화를 부추긴다. 신자유주의 다매체·다채널 시대의 뉴스는 마치 ‘커스터마이징 상품’처럼 특정 시청자에게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맞춤 서비스의 포장은 ‘공정성과 정확성’이다. 편향성을 유지해야 공정성을 추구하는 기존 시청자를 잃지 않게 된다.

어떤 담론이든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만, 다른 관점과 비교하고 충돌하고 조정되는 과정을 겪을 뿐이다. 담론은 고립돼 있지 않다. ‘공영방송’이라는 무균 지대가 따로 독립돼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독립된 방송이 아니라 고립된 방송이며 그야말로 편파적인 방송이 된다.

함부로 진실되고 공정한 보도를 하겠다고 선언할 수 없다. 이 선언은 자신의 진실만이 ‘진실’이라는 편견을 버리지 않겠다는 선언에 불과하다. 오류 가능성에서 출발하는 것, 그것만이 진실을 향해 가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저널리즘의 윤리는 진실에 대한 절대적인 독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면적 진실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공영방송’이란 말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른다. KBS 신임 사장은 취임식에서 “공영방송을 개인이나 집단의 이념이나 소신을 실현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분은 앞으로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 했다. 이 문장에서도 맥락적 모순이 읽힌다. ‘공영방송’이란 용어는 착시와 오해를 만든다. ‘공영방송’이라는 용어가 강화하는 신뢰는 ‘의존’을 만들고 의존은 ‘편향성’으로 이어진다.

어떤 경위로 박민 KBS 사장이 취임하고, 그 직후에 9시 뉴스 앵커가 교체되고 몇몇 프로그램이 결방 혹은 폐지되었는지 알 수 없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벗어난 것이라고 비판하기는 쉽다. 순진하고 무능해 보이는 경영진의 지시가 실은 공포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더 심각한 이슈를 덮고 중화시키는 연막전략이라고 추측하는 것 또한 음모일 뿐이다. 이런 경영진의 처사에 마치 헤게모니 투쟁을 하듯 ‘언론’을 이용하는 언론노조의 저항 방식 또한 그들이 저항하는 권력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진실의 자리는 비어 있는데, 서로가 서로를 겨냥해 진실이 아니라고 비난하는 격이다.

2023년 KBS를 둘러싼 나의 진실은 내 아버지에게 있다. 아버지는 공영방송의 공영을 믿으셨다. 이 믿음이 아버지에게 안정감과 인지부조화를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신념을 자식에게 강요하진 않으셨다. 아버지의 진실은 어쩌면 이 비강요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 아버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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