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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톳불 곁 위트와 노래·구수한 입담 아직도 ‘귓가에’

입력 : 2011-02-11 21:31:15 수정 : 2011-02-11 21: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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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유고 소설집·산문집 나와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으랴만, 지난해 8월 소설가 이윤기(1947∼2010)의 부음은 그를 기억하는 이들과 독자들의 가슴을 유난히 철렁이게 했다. 예기치 못한 그의 이른 죽음은 우리 시대의 빼어난 이야기꾼 하나를 잃는 아쉬움과 아픔이었다. 그가 생전에 살뜰하게 가꾸던 숲의 거름으로 사라진 지 반년 만에 민음사에서 출간된 유고 소설집 ‘유리 그림자’와 산문집 ‘위대한 침묵’이 그 빈자리를 채워주어 그나마 다행이다.

하나의 이야기를 펼칠라 치면 ‘삼천포’로 빠지면서 곁가지 이야기들을 종횡무진 자아내며 좌중의 폭소를 유발하는 그의 구수한 입담은 소문난 것이었다. 흥이 오르면 저음의 매력적인 목청으로 ‘뽕짝’까지 불러젖히는 멋쟁이였다. 소설가이기 이전에 번역가, 신화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담보하는 서구풍 ‘댄디’ 이미지는 된장 냄새 나는 노래가 이야기와 합쳐져 누구도 쉬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매력을 발산했다. 이런 매력에 폭넓은 인문적 지식과 유려한 문장까지 가세했으니 그는 가위 당대의 ‘가인’(佳人)이었다.

이러한 아버지를 두고 그의 딸 다희씨는 산문집 말미에 붙인 헌사 ‘아버지의 이름’에다 “정말이지, 아버지는 ‘너무’ 멋있었다”고 적었다. 남겨진 이들로부터 관성적인 그리움과 애틋함을 넘어서서 ‘멋있었다’는 찬사까지 듣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가 멋있는 사람이었다는 증좌는 유고로 출간된 산문집의 어느 꼭지를 들추어보아도 쉬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작명한 호는 ‘과인’(過人·지나가는 사람)이었다. 살림집 뒤에 지은 서재의 이름도 ‘과인재’였는데 ‘세상을 스쳐 지나가는 자의 집’이라는 의미였다. 이 ‘과인’은 시골 황무지를 사들여 세월의 눈금을 재는 방편으로 1500여그루의 나무를 심고 애지중지 돌보았다. 늦은 봄이면 목련 숲으로 친구들을 불러들여 그가 평생 사랑한 술과 더불어 생의 한때를 느껍게 향유했다.

‘떠난 자리’라는 산문에서 이윤기는 자신과 절친했던 미시간주립대학교 석좌교수 임길진 박사가 한국에 들어왔다가 그와 더불어 중학교 동창집을 방문했지만 부재중이라 포도주만 맡긴 채 미국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곧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뒤늦게 망인이 맡기고 간 포도주를 벗들과 함께 개봉하는 날의 분위기를 전하는 산문의 말미에서 그는 “죽음은 죽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잊히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라면서 “이렇듯 잊혀지지 않고 있으니, 그 떠난 자리가 참 아름답다”고 적었거니와, 이 말은 정확히 이제 고인이 된 그 자신에게 돌려주기에 적확한 말인 것 같다.

◇지난해 8월 작고한 소설가 이윤기씨. 그는 유고 산문에 “이으면 인연이요, 끊으면 절연인 법. 내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았다. 너는 인연을 잇느냐? 끊느냐?”고 적었다.
유고 소설집 ‘유리 그림자’에는 이윤기가 남긴 마지막 소설 네 편이 실렸다. 산문집의 기조와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주변 이야기를 조근조근 편안하게 들려주는 형식이다. ‘네눈이’는 진돗개 이야기다. 양 눈 위에 반점이 있어 ‘네눈이’로 불리는 이 개는 그의 가족들과 14년을 살다가 늙고 병이 들자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동네 노인들은 “죽으러 갔으니까 더 이상은 찾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이어지는 ‘소리’와 ‘하리’라는 단편도 역시 개 이야기다. 그는 산문집에서 “문득 ‘아함경’ 한 구절을 떠올렸다. 그렇지. 괴로움은 집착에서 오는 것이니, 집착하지 않는 하리에게 무슨 괴로움이 있으랴. 개한테 한 수 배웠다, 싶었다. 그나저나 하리와는 또 어떻게 헤어질꼬”라고 밝혔는데, 개와 더불어 나눈 이 아픔과 깨달음을 다시 소설로 펼쳐낸 것이다. ‘종살이’라는 짧은 단편에서는 후배 치과의사와 나눈 한마디가 그대로 소설이 되었고, 표제작인 ‘유리 그림자’에서는 투명한 것의 불완전함, 불완전한 것의 아름다움에 대한 역설을 송홧가루 날리는 유리창 밑에서 설파한다.

밤의 화톳불 곁에서 위트와 노래로, 촌철살인의 재담으로, 신화 속의 환상적인 이야기로 쉼 없이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은 이윤기라는 이야기꾼은 이제 우리 곁에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이야기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심은 나무들의 밑동으로 돌아가 대지와 더불어 쉬고 있겠지만, 정작 그가 남긴 이야기들은 그가 사랑한 나무들처럼 더 자라나는 중이다.

조용호 선임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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