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거장 김수근이 설계 충격
국가 폭력의 역사 반복 않도록
불법 계엄 세력 엄히 단죄해야
책이나 영화, 연극 등에 푹 빠지면 작품 속 배경이 되는 곳에 찾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2년여 전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미궁의 설계자’(극작 김민정, 연출 안경모)를 보고 나서도 그랬다. 이 연극은 군사독재정권 시절 악명 높았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국가 폭력의 잔혹함과 이 건물 설계자인 건축 거장 김수근(1931∼1986)을 겨냥한다. 뛰어난 작품성으로 이듬해 서울연극제 우수 작품상과 연출상, 우수연기상, 신인연기상은 물론 차범석 희곡상을 받는 등 여러 연극상을 휩쓸었다.
‘사람을 위한 건물을 짓는 건축가가 어떻게 사람을 해하는 건물을 설계하게 됐을까’란 의문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관객들이 암울했던 시대의 고통을 직시하며 여러 가지를 자문하게 한다. 김수근은 이 건물이 어떻게 쓰일지 모르고 설계한 것일까, 아니면 알고서도 의뢰인(국가·권력자) 마음에 들고자 인권·인격 말살에 최적화한 설계를 한 것일까. 지식인과 예술가의 윤리와 사회적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예술과 권력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어떤 형태든 권력의 부당한 요구에 직면했을 때 나는 끝까지 거부할 수 있을까 등등.

군사정권이 1970∼1980년대 민주화·노동 운동 인사 등 눈엣가시 같은 사람들을 잡아다 족치던 ‘고문 공장’의 실체를 직접 보고, 꼬리를 무는 질문에 대한 실마리라도 찾을 겸 연극이 끝나자마자 남영동 대공분실 자리에 달려가고 싶었다. 아쉽게도 불발됐다. 경찰의 과거사 청산 작업에 따라 2005년 경찰청인권센터로 탈바꿈한 이 대공분실이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새단장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민주화운동기념관이 6·10민주항쟁 38주년을 맞아 지난달 10일 개관한 뒤에야 밀린 숙제를 풀었다. 며칠 전 찾아간 기념관은 자유로이 관람할 수 있는 뮤지엄 M1(상설·특별 전시실)과 미리 예약해야 해설사와 함께 둘러볼 수 있는 M2(옛 남영동 대공분실) 등으로 이뤄졌다. M1에선 4·19혁명과 유신헌법 반대운동,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처럼 한국의 민주화운동 역사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애썼던 각계각층 시민들의 헌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공화국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민주주의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되새기며 인권 유린의 상징물인 M2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신체제이던 1976년 지어진 이 건물은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든 곳을 의미하는 ‘미궁(迷宮)’과 다름없었다. 여기에 잡혀 들어온 사람은 고문에 못 이겨 이적 행위를 했다고 허위자백하거나 동료를 밀고해야 나올 수 있었고, 그러지 않을 경우 초주검이 되거나 죽어서야 나왔다. 1985년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 가혹한 고문을 당한 뒤 남영동 대공분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김근태(1947∼2011)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1987년 물고문 끝에 숨져 6·10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가 대표적이다.
해설사의 안내에 귀를 쫑긋하며 찬찬히 돌아본 건물은 당대 최고 건축가의 인생 최대 오점이자 흑역사가 될 만했다. 전통미를 살린 검은 벽돌 등 김수근의 건축 미학이 곳곳에 배인 대공분실은 조사 대상자의 고통과 공포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계돼 있었다. 특히 조사실 15개가 양쪽으로 엇갈려 늘어선 5층은 괴물 자체였다. 눈이 가려진 채 끌려온 사람들이 공포심을 가중시키는 나선형 철제 계단을 밟고 올라와 갇힌 공간이다. 박종철이 숨진 509호실을 비롯해 조사실마다 고문 피해자의 투신을 막는 세로로 좁다랗게 난 창문과 어떤 비명도 삼켜버리는 흡음벽, 물고문에 쓰인 작은 욕조, 감시 카메라 등은 닮은꼴이었다. 당시 말도 못할 고초를 겪은 무고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떠올리니 가슴이 아렸다. 김수근이 어떻게 이런 건물을 설계하게 됐는지 더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다시는 국가 폭력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어렵게 성취한 민주주의를 지키며 건강하게 가꿔나가길 바랄 뿐이다. 12·3 불법 계엄 사태로 대한민국의 헌정 질서와 민주주의를 짓이기려 한 세력을 엄히 단죄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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