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배상은 전혀 별개 문제” 확고
카리브 국가들 “배상이 정의 실현”
앤디 버넘 영국 총리가 2026년도 영연방 정상회의 참석을 앞두고 노예 제도가 있던 시절 영국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관한 입장을 밝혔다. 카리브해의 섬나라 앤티가 바부다에서 1일(현지시간) 개막해 4일까지 나흘 일정으로 열리는 올해 영연방 정상회의에선 과거 노예 무역을 주도한 영국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올 전망이다. 당장 앤티가 바부다만 해도 영국 식민지 시절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이주 및 정착해 만들어진 나라로, 1981년에야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됐다.
지난 31일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버넘 총리는 이날 영국 일간 ‘가디언’ 기고문에서 영연방 정상회의에 임하는 영국 정부의 입장에 관해 밝혔다. 그는 과거 영국이 아프리카 주민 최소 1250만명을 납치해 대서양 건너 북미 대륙과 카리브해 섬들에 노예로 팔았던 과오를 시인했다. 이어 “영국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대서양 횡단 노예 무역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해 왔다”며 “나는 그 같은 요구에 열려 있다”고 덧붙였다.
영국 국가를 대표해 과거사에 대해 사과할 의향이 있음을 내비친 셈이다.
다만 버넘 총리는 금전적 배상 요구엔 확고히 선을 그었다. 그는 노예 무역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대, 다른 법 체계 아래에서 일어난 일”로 규정한 뒤 “오늘날의 영국인들이 개인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과거 역사적 잘못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설령 그 잘못이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그렇다”고 못 박았다.
영연방은 영국을 비롯해 과거 영국 지배를 받은 나라들 위주로 총 56개국이 참여하는 연합체로, 그 수장은 찰스 3세 영국 국왕이다. 이번에 영연방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앤티가 바부다 역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과 마찬가지로 찰스 3세를 국가원수로 섬긴다.
버넘 총리는 물론 찰스 3세도 영연방 정상회의에 참석할 예정인 가운데 버킹엄궁 대변인은 “국왕께서는 과거 영국의 가장 부끄러운 역사를 직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영국 정부 차원의 사과나 배상에 관해선 “(정치 불관여가 원칙인) 왕실이 영국 정부의 특정한 정책에 대해 뭐라고 언급하는 행위는 적절하지 않다”며 말을 아꼈다.
이날 가디언 기고문에서 버넘 총리는 영연방에 속한 카리브해 섬나라들이 강력히 요구하는 배상 대신 장기간에 걸쳐 상환이 가능한 낮은 금리의 우호적인 차관 제공을 제안했다. 섬나라들이 직면한 부채 문제 해결에 영국 정부가 실질적으로 기여하겠다는 뜻이다. 앤티가 바부다 정부의 개스턴 브라운 총리는 영국의 이 같은 제안을 환영하면서도 “배상을 통해 정의가 실현돼야 한다는 카리브 국가들의 입장엔 변화가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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