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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대 오르는 예술 작품, 경계를 다시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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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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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품 변기에 이름 쓰고 ‘샘’ 명명
마르셀 뒤샹 도발로 패러다임 변화
NFT로 판매 위해 원작 태운 사건
벽에 테이프로 바나나 붙인 작품 등
예술과 법 사이 충돌하는 지점 다뤄
판결 따라 새 예술 인정 계기되기도

법정에 선 예술가들/ 캐슬린 김/ 작가정신/ 2만5000원

 

프리다 칼로의 그림 한 점이 불길에 사라졌다. 원작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실물 작품을 고해상도로 디지털화한 뒤 대체불가토큰(NFT)으로 판매하기 위해서였다. 추정가 1000만달러(약 133억7400만원)에 이르는 작품을 태운 사건은 미술계를 뒤흔들었다. 작품을 소유한 사람에게 원작을 파괴할 권리까지 있는가. 실물이 사라진 뒤에도 작품의 가치는 남을 수 있는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사진)의 ‘코미디언’도 유사한 질문을 던진다. 벽에 테이프로 붙인 바나나가 작품의 전부가 아니다. 구매자가 소유하는 것은 설치 매뉴얼과 작가의 진품 증명서, 작품을 재현할 권리다. 바나나는 먹어도 되고 썩어도 된다. 물질적 실체가 사라져도 작품의 개념은 남는다.

미국 뉴욕주 변호사이자 예술법 전문가인 저자는 ‘법정에 선 예술가들’에서 실제 법정과 미술 현장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통해 예술과 법이 충돌하는 지점을 다룬다. 법정과 미술관, 계약서와 전시장을 오가며 예술이 어떻게 사법 체계와 부딪히고 자본의 논리와 얽히며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는지를 보여준다.

캐슬린 김/ 작가정신/ 2만5000원
캐슬린 김/ 작가정신/ 2만5000원

책의 출발점은 ‘이것도 예술인가’라는 질문이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은 기성품 변기에 ‘R. Mutt’라는 이름을 쓰고 ‘샘’이라고 명명했다. 기존 미술의 기준으로는 작품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이 도발은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이후 예술의 정의를 둘러싼 논쟁은 미술관을 넘어 법정으로 옮겨갔다.

콩스탕탱 브랑쿠시의 ‘새’도 논란이 된 작품이다. 미국 세관은 이 작품을 예술품이 아닌 상품으로 판단해 관세를 부과했다. 당시 법이 규정한 예술품의 범주와 추상적인 조각의 형태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무엇이 예술품인가’가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됐다.

창작과 표절의 경계도 법정에서 끊임없이 다뤄진다. 제프 쿤스는 사진작가 아트 로저스의 엽서 사진을 활용해 조각 작품을 만들었다. 원본을 입체적으로 변형했지만, 법원은 원본의 핵심적인 구성과 이미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판단했다. 쿤스는 패러디와 사회비평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앤디 워홀과 셰퍼드 페어리 등도 기존 이미지를 차용한 작품을 둘러싸고 저작권 분쟁을 겪었다. 예술에서는 기존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고 이를 변주하는 일이 흔하다. 하지만 법은 원작자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 어디까지가 새로운 창작이고 어디부터가 저작권 침해인지 경계는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다.

‘진짜와 가짜’를 둘러싼 법정 공방도 흥미롭다. 네덜란드 화가 한 판메이헤런은 나치 최고 권력자까지 속인 위조범으로 유명하다. 자신이 위작을 그렸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경찰의 감시 아래 직접 그림을 그려야 했다. 예술품의 진위가 단순한 감식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권력, 미술시장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미술품을 투자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늘면서 작품의 가격과 예술적 가치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생긴다. 책에서는 ‘확정 수익’이나 ‘원금 보장’처럼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 미술품이 예술 작품인지 투자 상품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작품의 가격이 비싸다고 해서 그 작품의 예술적 가치까지 높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책은 마지막으로 인공지능(AI)이 예술을 만드는 시대에 던져진 질문을 살펴본다. 사람이 프롬프트를 입력하고 AI가 그림을 만들어낸다면 과연 누가 그 작품의 창작자일까. AI가 기존 예술 작품을 학습해 새로운 그림을 만들 경우, 이를 단순한 학습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작품을 허락 없이 이용한 저작권 침해로 봐야 할지도 문제다.

저자는 AI 예술의 핵심이 기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창작했는가’에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저작권은 사람이 직접 창작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왔다. 하지만 AI가 수많은 작품을 학습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면서 기존의 저작권 기준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결국 AI 시대에는 인간이 어느 정도 개입해야 그 결과물을 인간의 창작물로 인정할 수 있는지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법이 예술을 일방적으로 규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법정에 선 예술가들의 주장은 오히려 기존 제도의 한계를 드러내고, 새로운 예술을 인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때 사기나 외설, 혹은 ‘예술이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았던 작품들이 시간이 흐른 뒤 새로운 예술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진 사례도 있다.

결국 법정은 예술을 심판하는 곳인 동시에 예술의 경계를 다시 그리는 곳이기도 하다. 책은 법정에 선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예술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과 창작자의 권리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를 보여준다. 법은 예술을 가두는 울타리만이 아니라, 때로는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창작의 자유를 넓히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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