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주하는 세계/ 바츨라프 스밀/ 이한음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만2000원
우리는 어느 때보다 빠른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동차와 비행기는 빨라졌고, 스마트폰을 통해 지구 반대편의 소식도 순식간에 받아본다. 인공지능(AI)까지 등장하면서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환경과학자이자 경제사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세상의 가속’에 의문을 던진다. 기술이 발전했다고 해서 삶의 모든 영역이 함께 빨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비행기다. 라이트 형제가 처음 하늘을 날았을 때 비행기 속도는 시속 16㎞ 남짓이었다. 반세기 뒤 보잉 707은 시속 890㎞로 대서양을 건넜다. 20세기 전반에는 비행 속도가 눈부시게 빨라졌다. 하지만 이후에는 초음속 여객기 등을 제외하면 속도가 크게 높아지지 않았다. 자동차도 비슷하다. 성능은 좋아졌지만, 도로의 교통체증은 심해졌다. 공항에 가면 보안검색과 탑승을 위해 기다려야 한다. 자동차나 비행기의 최고속도가 높아졌다고 해서 집에서 목적지까지 걸리는 시간이 반드시 짧아진 것은 아니다.
집안일도 마찬가지다. 전자레인지와 진공청소기 같은 가전제품은 한 가지 일을 빠르게 해준다. 그러나 빨래와 요리, 청소 등 일상생활 전체가 과거보다 훨씬 빨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세상이 한층 더 빨라질 것이라는 기대 역시 실제 현실과는 다를 수 있다.
책은 지각판의 움직임부터 치타와 인간의 달리기, 곡물 생산, 돛단배, 증기기관과 자동차, 산업 생산과 컴퓨터 기술까지 다양한 사례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속도’와 ‘변화율’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동차가 시속 몇㎞로 달리는 것은 속도지만, 경제가 몇 퍼센트 성장했는지, 인구가 얼마나 늘었는지는 변화율이다. 서로 다른 것을 우리는 흔히 ‘세상이 빨라지고 있다’는 말로 한데 묶어버린다는 것.
저자는 “어떤 분야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지만 다른 분야는 한계에 부딪혀 더는 빨라지지 않는다. 한 분야의 발전이 곧 세상 전체의 가속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책은 빠르게 변하는 시대일수록 오히려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눈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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