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580돌에 부쳐—
곧 한글날이다. 올해는 훈민정음 반포 580돌이다. 해마다 이날이면 우리는 한글의 과학성과 창제 정신을 되새긴다. 그러나 올해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세종은, 그리고 그의 아들 세조는 새로 만든 문자인 훈민정음으로 무엇을 남겼는가.
지난 7월 22일 서울역사박물관 야주개홀에서 《월인천강지곡》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국제학술대회 ‘월인 콘퍼런스 2026’이 열렸다. 한국·일본·인도·이탈리아의 학자들이 참석했고, 필자는 종합토론 좌장을 맡아 ‘월인천강지곡의 총체적 가치와 세계기록유산 등재 과제’를 함께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거듭 확인한 것은 《월인천강지곡》을 소헌왕후의 명복을 비는 찬불가로만 이해해서는 그 가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소헌왕후의 죽음이 이 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그러나 그 안에는 훈민정음 서문에 담긴 정신, 곧 백성을 위해 바른 가르침을 쉽게 전하려는 뜻이 깊이 새겨져 있다.
《월인천강지곡》에 앞서 《석보상절》이 있었다.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447년, 세종의 명을 받은 수양대군이 여러 불교 경전에서 부처의 일생과 가르침을 가려 뽑아 우리말과 새 문자로 풀어쓴 책이다. 모두 24권에 이르는 대작이었다. 세종은 아들이 올린 《석보상절》을 읽고 깊이 감동해 손수 600수에 가까운 노래를 지었다. 이것이《월인천강지곡》이다. 아들이 산문으로 부처의 삶과 가르침을 풀어냈다면, 아버지는 운문으로 화답한 셈이다. 《석보상절》이 경전의 본문이라면 《월인천강지곡》은 그에 화답하는 게송과 같은 역할을 한다. 훈민정음으로 만든 산문과 운문의 걸작이 세종과 세조 부자의 손에서 함께 탄생한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훗날 왕위에 오른 세조, 수양대군은 1459년 두 작품을 하나로 엮어 《월인석보》를 완성했다. 아버지 세종의 노래인 《월인천강지곡》을 앞세우고,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을 뒤에 붙이는 방식이었다. 세조는 《월인석보》 서문에서 당시 전해지던 수다라(十二部修多羅), 곧 불교 경전들을 두루 살피고 한두 구절을 더하거나 덜어가며 뜻에 맞을 때까지 거듭 다듬었다고 밝혔다. 의심나는 대목은 널리 묻고 확인했으며, 그 과정에서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도 서문에 남겼다. 여기에는 혜각존자 신미를 비롯해 수미·설준·홍준·효운·지해·해초·사지·학열·학조 등 당대의 고승 열 명과 유신 김수온까지 모두 열한 명이 포함돼 있다. 이는 《월인석보》의 편찬이 왕실의 개인적인 불사를 넘어, 당대 조선의 불교학과 어학, 문헌학적 역량이 함께 동원된 대규모 편찬 사업이었음을 보여준다.
필자는 완성된 《월인석보》를 ‘조선대장경’의 효시로 본다. 고려가 국가적 역량을 모아 한문으로 대장경을 새겼다면, 조선은 그 대장경의 정수를 새롭게 만든 백성의 문자, 훈민정음으로 풀어냈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는 서로 떨어진 세 권의 책이 아니다. 한 뿌리에서 나온 하나의 거대한 작업이다. 《석보상절》이 씨앗을 뿌리고 《월인천강지곡》이 노래로 꽃을 피웠다면, 《월인석보》는 두 작품을 하나로 묶어 열매를 맺은 셈이다. 나누면 셋이지만, 합하면 하나의 훈민정음 문학사다.
이 전통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지난 9월 인사동 동덕아트갤러리에서 만난 문인화 명인 창현 박종회 선생의 ‘세종대왕과 월인천강지곡’이다. 박 작가는 여섯 달에 걸쳐 가로 8m가 넘는 마지에 《월인천강지곡》 권상 9986자를 한 자 한 자 완필했다. 580년 가까운 세월을 건너온 세종의 노래가 오늘 한 예술가의 붓끝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옛 기록이 박물관 속 유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예술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제는 이 책들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고 연구하며, 오늘의 문화예술로 발전시켜 나갈 때다. 《월인천강지곡》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원본을 품은 세종시를 비롯해 청와대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간에서 이 책들이 우리 문화의 얼굴로 세계의 손님을 맞는 날도 기대해본다.
천 개의 강에 비친 하나의 달.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는 이름처럼, 올 한글날에는 한가위 보름달을 바라보듯 훈민정음 문학의 백미로 빛나는 《월인천강지곡》을 다시 읽어볼 일이다. 그리고 그 노래가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귀 기울여볼 일이다.
정진원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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