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정체성·시대 맥락 포착
미학적 연구·현장 경험 더해
예술의 세계 풀어내는 작업
AI 발전으로 누구나 가능?
‘좋은 번역’ 수요는 되레 증가
시카고 큐레이터·공공외교
김지원 아떼어바이 대표
“행간 잘 읽어 투명한 전달
원작자 의도가 지향점 돼야”
전시 공간에서 접하는 수많은 글. 작품이 직관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면 글은 작품을 둘러싼 사유의 뼈대를 세우고 관객과 작품의 거리를 좁힌다. 전시 서문과 작가노트, 캡션과 영상 자막에 이르기까지 전시실 안을 흐르는 텍스트 중 보이지 않는 손을 거쳐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저자의 이름 뒤에서 생각의 결을 다듬어 관객에게 건네는 사람. 바로 미술 번역가다.
미술 번역은 단순히 언어의 껍데기를 바꾸는 기술적 작업이 아니라, 작가의 사유와 시대적·문화적 맥락, 그리고 미묘한 뉘앙스를 타국어의 토양 위에 새롭게 심는 고도의 ‘비평적 매개’다. 전시와 매체, 독자의 성격에 따라 문체와 호흡도 달라지기 때문에, 미술 번역가에게는 언어학적 정확성을 넘어 미술사적 안목과 감각이 요구된다.
◆사유의 궤적을 비추는
시카고를 기반으로 예술 에이전시 ‘아떼어바이(ARThereby)’를 이끄는 김지원 대표는 독립 전시 기획과 연구, 영문 번역 및 출판물 편집을 아우르며,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작품과 관객, 작가와 기관을 연결하는 일을 중심에 두고 활동한다.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재)광주비엔날레 등 국내 주요 미술 기관에서 큐레이터 및 전시 코디네이터로 현장을 누볐고, 해외 주재 공관에서 공공외교 업무를 맡기도 했다.
김 대표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매개’의 영역에 있었다고 복기한다. 각기 다른 일처럼 보이지만, 모두 ‘타인의 세계를 어떻게 온전히 이해하고 다른 이에게 풀어낼 것인가’라는 하나의 질문 안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다양한 공간과 매체, 작가와의 소통을 직접 체화해 온 그의 현장 경험은, 고도로 압축된 미술비평의 언어를 다룰 때 사유의 방향을 잡아주는 든든한 기반이 되어준다.
그는 미술 번역을 ‘원작자가 그린 사유의 궤적을 투명하게 비추는 일’이라 정의한다. 작가가 수많은 고심 끝에 미적 결정을 내리고 비평가가 이를 글이라는 형태로 논리화한다면, 번역가는 그 텍스트에 겹겹이 쌓인 감상과 사고의 층위를 깊게 읽어낸 뒤 다른 언어 안에서 충실하게 다시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창작과 매개 사이에서
번역이 단순히 단어를 옮기는 일을 넘어 원문의 감각을 새롭게 구현한다는 점에서, 번역가를 ‘매개자’로 볼 것인지 ‘창작자’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도 존재한다. 특히 단어 하나가 비평적 해석을 결정짓는 미술 분야에서는 이 경계가 더욱 아슬아슬하다. 번역가는 어느 정도까지 ‘보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자신의 해석과 판단을 드러내야 하는가.
이에 대해 김 대표는 번역가의 위치를 ‘투명한 매개자’ 쪽에 정립한다. 한 언어의 문장을 새롭게 세우는 과정은 창작에 가까운 고민을 동반하지만, 그 지향점은 언제나 원작자의 의도여야 한다는 신념이다. 단어의 고유한 뜻은 물론 문체의 숨결과 리듬, 독자가 속한 문화적 맥락까지 샅샅이 살피되, 스스로를 내세우기보다 원저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지도록 무대 뒤로 물러선다. “독자가 번역문을 읽으며 ‘저자는 왜 하필 이 말을 썼을까?’라는 질문을 품게 된다면, 번역가로서 제가 놓은 다리가 제 역할을 다한 것이라 믿습니다.”
이러한 매개자로서의 윤리는 시대와 언어의 흐름을 포착하는 감각으로 확장된다. 그는 영어권의 성별 지칭 대명사처럼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정치적 맥락이 얽힌 어휘를 다룰 때, 번역가는 시대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어에서 다소 낯설게 읽힐 위험이 있더라도 번역가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원문의 시대적 기호를 지워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저자의 목소리 앞에서는 투명하게 물러서되, 문화적 간극으로 인해 글의 의미가 닫힐 위험이 있는 순간에는 섬세하게 개입해야 한다.
◆좋은 번역에 대하여
영어의 범용화와 인공지능(AI) 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누구나 쉽게 외국어 텍스트를 번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도, ‘좋은 번역’에 대한 갈증과,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식별력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고 있다. 지식과 사유, 감수성과 창의성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는 미술 현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김 대표는 단어 사이의 미묘한 뉘앙스와 맥락을 포착하는 ‘행간을 읽는 눈’에 주목한다. AI가 훌륭한 보조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작품과 비평적 텍스트의 맥락을 섬세하게 읽어내고 그 의미를 다른 언어 안에서 설득력 있게 재구성하는 일에는 여전히 번역가의 판단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비유적 은유, 개념어 사이의 긴장감, 감성적 울림을 포착해 타 언어권 독자에게 책임 있게 전달하는 일은 축적된 경험과 미학적 연구가 결합할 때에만 가능하다.
김 대표는 ‘좋은 번역’이란 기본으로 돌아가 읽기 좋은 글을 만드는 데서 출발하며, “문법적으로 단단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원문의 논리와 문체가 번역된 언어 안에서도 설득력 있게 살아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압축된 개념어와 저자 특유의 문체가 빽빽하게 얽혀 있는 미술 텍스트에서, 그는 단어 하나의 정확성을 따지는 일과 글 전체의 호흡을 다듬는 일을 분리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언어의 특성을 세심하게 살피고, 표현 하나하나가 놓인 맥락을 꼼꼼하게 확인한다. 언어의 특성과 문화를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정교함, 그리고 오랜 시간 미술 현장에서 축적된 감각이 촘촘하게 맞물릴 때, 비로소 믿고 읽을 수 있는 단단한 번역이 나온다.
◆시대를 함께 건너는 일
치열한 고민과 수많은 선택의 기로를 지나 자신이 다듬은 문장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 독자에게 건네질 때, 그는 이 고단한 과정을 지속하는 이유를 선명하게 체감한다.
김 대표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미술 번역이라는 여정을 멈추지 않는 바탕에는 미술과 동시대 예술가들을 향한 깊은 애정이 자리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시대를 작가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치열하게 벼려내는 그 방식을 여전히 사랑합니다.” 시대의 소용돌이를 날카롭게 포착해 낸 작가의 언어를 텍스트로 변주해 타국어로 옮기는 일. 이는 단순히 글을 다듬는 것을 넘어, 동시대의 치열한 사유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에 동참하는 과정이다.
오늘도 전시장 한구석, 작품과 관객 사이를 잇는 문장들 뒤에는 시대를 읽어내고 사유의 궤적을 묵묵히 옮겨 적는 번역가의 투명한 시선이 흐르고 있다.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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