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만들고 끝내 버린 것들
전쟁·폭염·재난으로 되돌아와
아버지 여의고 어머니 병상에
죽음 쪽에서 삶 보는 눈 얻어
쓰러진 몸 일으킨 건 결국 사랑
초기 탈주체·난해 키워드 벗고
기후와 재난, 돌봄과 상실 등
현실적인 문제 더욱 귀 기울여
“오늘은 내가 나무문이 되어 서 있을게. 긴 겨울과 긴 여름과 긴 장마를 겪고, 끼익 끼익, 어딘가 꺼림칙하고 불길한 소리를 내는……” (‘메리를 위하여’ 부분)
일곱 번째 시집 ‘무서운 이야기’(문학과지성사)를 펴낸 시인 김행숙(56)은 시집의 첫머리에서 영국 소설가 메리 셸리(1797~1851)를 불러낸다. 1816년 여름, 셸리는 스위스 제네바 호숫가에 머물렀다.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대폭발 영향으로 유럽 전역이 이상기후에 시달리던 때였다. 연일 이어지는 비 때문에 줄곧 실내에 머물던 셸리 일행은 각자 무서운 이야기를 지어보자는 내기를 벌였고,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이 ‘프랑켄슈타인’이다.
8일 서면으로 만난 김행숙은 시집의 문을 여는 인물로 메리 셸리와 괴물을 선택한 데 대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인간이 만들어냈지만 책임지지 않은 존재”라며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도 그런 것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인공지능(AI)과 전쟁이 그렇고, 폭염과 산불이 그렇고, 세계 곳곳의 재난이 그렇다. 버림받은 괴물의 말을 정말 잘 들어봐야 한다. 이제는 거꾸로 인간이 괴물에게 버림받는 세계가 도래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무서운 이야기’는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2020, 문학과지성사) 이후 그가 6년 만에 묶은 시집이다. 총 4부, 50편의 시가 수록됐으며, 산문 ‘시지프스의 판본들’이 시집의 문을 닫는다. 책 곳곳에는 기후위기와 팬데믹, 사회적 파국의 징후가 스며 있다. “올여름은 모든 게 다 체온과 비슷하게/35도, 36도, 37도쯤에 매달려 있어.”(‘응급실 가는 길’ 부분)라는 문장은 더는 비유로 읽히지 않는다.
시인은 자신을 움직인 강력한 ‘공포’의 감정을 돌아봤다. 그는 “2020년 팬데믹의 기이한 일상을 겪으면서부터 공포가 깊숙이 자리 잡았다”며 “심리적으로 재난영화를 살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그러다 보니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라는 심정이 되었고,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이 못 된다는 걸 알았다. 시를 쓰기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공포의 근원은 기후와 전염병만이 아니었다. 시편 ‘12월 3일’에는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의 충격이 담겼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본문에는 실존하지 않는 “12월 32일”이라는 날짜가 반복해 등장한다. 시인은 “12월 3일 가장 먼저 사로잡힌 감정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었다”며 “그 날이 12월 32일이라는 달력에 없는 날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이어 “느닷없이 12월 32일에 오도 가도 못하고 갇히게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며 “비극이면서 희극적인 데가 있는 아주 이상한 날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시인은 “시를 쓸 수 없”도록 하는 “공포”에서 오히려 “그래서 스프링처럼 쓰지 않을 수 없”게끔 하는 “사랑”을 발견한다. 그래서 ‘무서운 이야기’는 공포에 대한 책인 동시에 사랑에 관한 책이다. 그는 “시를 쓰기 어려운 한편으로 절박해지는 마음이 일어났는데, 마음과 함께 몸을 일으킨 것은 결국 사랑이었다”고 말했다. “무엇인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결국 내게 사랑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용기 역시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는 “용기는 공포의 반대편에 있지 않다”며 “두려움이 없는 사람에게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래서 시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비극을 설명하며 공포, 연민, 카타르시스를 연결했던 것처럼, 오늘날 기후위기 앞에서 “공포, 사랑, 용기를 엮어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번 시집 곳곳에는 제사(題詞)와 각주, 인용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카프카와 이상, 김수영의 텍스트와 동시대 작가들의 글이 시 안으로 들어온다. 시편 ‘서울, 2049년 겨울’은 소설가 최진영의 ‘쓰게 될 것’(2024, 안온북스) 속 문장을 제사 삼아 시작하고, 여러 시편이 오래된 이야기와 타인의 목소리를 불러들이며 전개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태도가 시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면 인터뷰 답변에서조차 김행숙은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라는 심정을 전한 뒤 괄호 안에 그와 동일한 제목의 소설집(2025, 문학과지성사)을 발표한 작가 공현진의 이름을 덧붙였다.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순간에도 ‘나’ 안에 섞여 있는 타인의 목소리를 드러낸 셈이다.
왜 이렇게 많은 목소리를 시 안으로 데려오는 걸까. 시인은 “혼자 글을 썼다고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착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라고 답했다. 이어 “나의 말, 생각, 문장, 꿈, 그 어떤 것도 오롯이 내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내게 시적인 상태는 언제나 더 많은 목소리들이 내 몸과 감각을 사용한다는 느낌 속에 있다”고 했다.
책에는 프랑켄슈타인, 피노키오, 시지프스 같은 오래된 이야기들이 새로운 판본으로 되살아난다. 왜 이런 변주를 택했을까. 시인은 “오래된 이야기라면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기억된 수많은 판본들이 보이지 않는 형태로 존재한다”고 운을 뗐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꿈속을 다녀갔겠어요. 오래된 이야기를 건너다닌 숱한 이야기의 유령들은 엉뚱한 길목에서 나를 통과하기도 하겠죠. 그런 순간에 붙들리면 오래된 이야기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고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얼굴을 꺼내놓기도 합니다.”
시집 3부에는 노년과 돌봄, 가족과 상실을 둘러싼 사유가 두드러진다. 시인은 지난해 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 역시 병상에 누워 있다. 시편 ‘나의 길’ 속 “젊은 엄마와/늙은 엄마와 죽은 엄마가 마구 구겨져 있었”다는 구절은 이러한 시간을 통과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으로 읽힌다.
시인 자신 역시 한동안 아파서 일상이 무너진 나날을 겪었다. 그는 이 모든 경험이 “당연히 시와 시쓰기에 영향을 미쳤다”며 “언젠가부터 삶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쪽에서 삶을 바라보는 눈 한 짝을 가지게 된 것 같다”고 답했다. 이어 “먹는 것, 잠드는 것, 잠에서 깨는 것, 걷는 것, 손을 움직이는 것. 그런 작은 일들이 죽음의 자리에서 보면 너무 놀랍고 기적적인 것이었다”고 했다.
돌아보면 2003년 첫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사)를 비롯한 초기작에서 김행숙의 시는 평론가들에게 종종 ‘비인칭’ ‘탈주체’ ‘난해’ 등 키워드로 읽혔다. 일군의 시인들과 함께 ‘미래파의 전위’로 묶였고, 그래서인지 김행숙 시의 감각과 환상은 현실과 무관한 특징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는 기후와 재난, 돌봄과 상실, 정치적 파국 같은 현실의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다. 김행숙의 시 세계가 점점 현실 쪽으로 밀착해 가는 것일까? 도식적인 ‘우문’에 시인은 ‘현실’의 진의부터 다시 묻는 ‘현답’을 보내왔다.
“현실 아닌 것이 거의 없다고, 다시 말해 ‘한 개를 보고 아흔아홉 개를 못 보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라고. “현실은 보기에 따라 택배 상자처럼 작아질 수도 있고 우주처럼 무한해질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는 “변화가 있었다면, ‘못 보는 아흔아홉 개’보다 우리 모두가 보고 있는 ‘한 개’ 안에서 못 보는 것들을 살피려는 마음이 더 커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시편 ‘서울, 2049년 겨울’에서 시인은 미래 세대를 향한 사랑의 편지를 띄운다.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 아이에게/죽은 사람을 질투하는 아이에게/내가 사랑하는 아이에게/쓰게 될 편지를/지금 쓴다.” 재난에 대한 공포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시인이 끝내 마음을 두는 곳은 자신 이후의 시간을 살아갈 존재들이다. “‘이후의 시간’에 대한 근심은 내가 살아 있지 않을 시간을 살아갈 미래의 존재들에게 연결됩니다. 살아 있지 않을 시간을 사랑하는 일도 살아 있을 때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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