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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섭의전쟁이야기] 소련을 강대국 만든 스탈린그라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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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연합국이 2차대전의 흐름을 역전시킨 결정적 전투로 스탈린그라드, 제2차 엘 알라메인, 과달카날을 꼽는다. 그중에서도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규모가 가장 컸고, 가장 처참했으며, 상징성도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전투는 연합국 안에서 소련의 위상을 바꾸고, 소련을 전후 질서를 좌우할 강대국으로 끌어올린 전환점이기도 했다.

1942년 봄까지 소련은 연합국 전략에서 미·영과 대등한 축이 아니었다. 전쟁의 주요 전략은 미·영이 함께 결정했고 소련은 그 바깥에서 통보받는 쪽에 가까웠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막대한 영토와 병력을 잃고 서방의 지원에 기대는 처지이기도 했다. 이해 소련의 핵심 요구는 제2전선, 곧 미·영이 서유럽에 상륙해 독일군을 서쪽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5월 말 워싱턴을 방문한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이를 강하게 요구했고, 6월 미·소 공동성명에 1942년 제2전선 문제가 언급됐다.

그해 여름 독일군이 캅카스와 스탈린그라드까지 밀려오면서 제2전선은 더욱 절박해졌다. 그러나 소련에는 딜레마가 있었다. 서방의 지원은 필요했지만, 미국 외교관들이 관찰한 바와 같이 도움을 청하는 약한 나라로 비치는 것은 극도로 꺼렸다.

그런 점에서 스탈린그라드는 군사적 의미를 넘어 외교적 의미까지 지녔다. 함락된다면 “우리가 독일군 주력을 붙들고 있으니 당신들도 싸우라”는 요구가 자칫 “우리를 구해 달라”는 호소로 들릴 수 있었다. 이 도시를 지키는 일은 소련이 서방과 대등한 동맹으로 남을 수 있냐의 문제이기도 했다.

소련군은 몇 달을 버텨냈고, 11월 천왕성 작전으로 오히려 독일 제6군을 포위했다. 소련은 독일군의 공격에 버티기만 하는 나라가 아니라 그 주력을 격파할 수 있는 전략적 동반자임을 입증했다.

서방의 시선도 달라졌다. 미국 타임지는 스탈린을 1942년 올해의 인물(사진)로 선정했다. 루스벨트는 처칠, 스탈린과의 정상회담을 제안하며 전쟁 수행 전략뿐만 아니라 독일 패망 이후의 문제까지 논의하고자 했다. 스탈린은 전선을 떠날 수 없다는 이유로 응하지 않았지만, 이듬해 카사블랑카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은 ‘무조건 항복’ 원칙을 선언했다. 이는 추축국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선언인 동시에, 서방이 소련을 두고 독일과 따로 강화하지 않으리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이제 연합국 외교의 축은 소련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에서 세 강대국이 함께 전쟁을 끝내고 그 뒤의 세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로 옮겨갔다. 그 변화를 상징한 것이 스탈린까지 참석한 1943년 테헤란 회담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영국 국왕이 헌정한 ‘스탈린그라드의 검’이 스탈린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1945년 얄타에서 스탈린이 루스벨트, 처칠과 마주 앉아 전후 세계를 논의할 수 있었던 힘은 회담장에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 힘은 끝까지 도시를 지켜내고 독일군을 오히려 역포위해 무너뜨린 스탈린그라드에서 비롯되었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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