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유출과 국가위기관리/이연 지음/박영사/2만원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하면서 ‘기술’이 국가안보의 핵심 자산으로 떠올랐다. 관세와 공급망을 둘러싼 갈등의 이면에는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배터리, 원전 등 첨단기술을 선점하려는 치열한 경쟁이 자리 잡고 있다. 기술은 이제 기업의 경쟁력을 넘어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는 전략자산이 됐다.
한국재난정보미디어포럼 회장이자 선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인 이연 저자는 ‘기술유출과 국가위기관리’에서 기술유출을 단순한 기업 내부의 보안사고나 영업비밀 침해가 아니라 국가의 경제안보와 직결되는 ‘국부유출’이자 국가위기로 규정한다. 특히 반도체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이 우수 기술과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벌이는 경쟁을 살펴보며 우리나라가 기술패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짚는다.
최근 기술패권 경쟁에서 가장 치열한 분야는 단연 반도체다. 미국·한국·대만·중국·일본 등 주요국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생산시설을 확대하는 동시에 최고의 연구자와 엔지니어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기술 자체뿐 아니라 기술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 된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현실에서 ‘인재 유출’을 기술유출의 중요한 축으로 바라본다. 아무리 뛰어난 연구개발 시설과 생산설비를 갖추더라도 이를 운용하고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낼 인재가 빠져나간다면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술보호 정책은 기술 자체를 지키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우수 인재가 국내에서 연구하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까지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은 실제 사례를 통해 기술유출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핵심기술 유출 사건과 KAIST 교수의 자율주행 관련 핵심기술 유출 사례 등을 비롯해 국가핵심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간 사례를 소개하며 기술유출이 기업의 손실을 넘어 국가 전체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음을 설명한다.
특히 중국의 적극적인 인재 확보 전략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중국은 이른바 ‘천인계획’ 등을 통해 해외의 우수 과학자와 기술자를 적극적으로 영입해왔다. 높은 보수와 연구비, 주거와 자녀 교육 지원 등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핵심 인재를 끌어들이는 전략이다. 이는 기술을 직접 훔치는 것만큼이나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진행되는 ‘인재 확보전’이 기술패권 경쟁의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일본의 사례에도 주목한다. 일본은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과 중국 등으로 기술자들이 이동하기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이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다. 일본의 기술을 습득한 한국과 중국 기업들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일본의 산업 경쟁력을 추격했고, 결국 일본 반도체 산업의 쇠퇴에도 기술인력의 이동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특히 일본이 최근 뒤늦게 기술유출 방지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2025년 ‘기술유출대책 가이던스’를 내놓은 것도 기술유출을 국가 차원의 경제안보 문제로 인식한 결과다. 책은 이 같은 일본의 정책과 대응 사례를 소개하면서 우리나라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기술유출을 막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가 강조하는 핵심 가운데 하나가 기업 내부의 ‘컴플라이언스’다. 컴플라이언스는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을 넘어 내부통제와 윤리경영, 사회적 책임까지 포괄한다. 기술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외부의 산업스파이를 감시하는 것만큼이나 기업 내부의 보안 시스템과 조직문화를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실제로 첨단기술의 유출은 외부인이 갑자기 침입해 정보를 훔쳐가는 방식으로만 발생하지 않는다. 핵심 연구자나 임직원이 퇴직하거나 경쟁업체로 이직하는 과정에서 기술과 정보가 함께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 협력업체와의 공동연구, 해외 출장, 합작회사 설립, 기술이전 과정에서도 중요한 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
따라서 기업은 핵심기술의 분류와 접근권한 관리부터 퇴직자 관리, 해외 협력사업, 연구자료 보안, 내부 정보 접근 기록 등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책은 기술유출을 막기 위한 기업 차원의 매뉴얼과 내부통제 시스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기술유출의 원인을 단순히 ‘돈’에서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수 인재가 회사를 떠나는 데는 연봉뿐 아니라 업무환경, 승진과 인사제도, 노동시간, 연구 자율성, 조직문화, 회사의 미래 비전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한다. 결국 인재를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기술보호책은 구성원이 조직을 떠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법과 제도 역시 중요한 방어막이다. 책은 한국·미국·일본의 기술유출 관련 법령과 처벌제도를 비교하면서 각국이 기술안보를 어떻게 강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미국은 산업스파이방지법(EEA)과 영업비밀보호법(DTSA) 등을 통해 영업비밀과 첨단기술의 해외 유출을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다. 일본 역시 경제안보를 강화하면서 경제안전보장추진법과 관련 법제를 통해 핵심기술과 중요 정보의 보호를 강화하는 추세다.
우리나라 역시 국가핵심기술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법을 강화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유출이 발생하기 전에 위험을 발견하고 차단하는 예방 시스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기술패권 시대에는 기술개발과 기술보호가 하나의 전략으로 묶여야 한다는 것이다.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투입해 세계 최초의 기술을 만들어놓고도 핵심 인력이나 기술정보가 해외로 빠져나간다면 그동안의 투자는 한순간에 경쟁국의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특히 한국처럼 수출과 첨단 제조업에 국가경제가 크게 의존하는 나라에서 기술유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반도체와 배터리, 디스플레이, 원전, 바이오 등 국가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지는 분야에서는 기술 하나의 가치가 수조원에 이를 수 있다. 기술을 지키는 일이 곧 국가의 부와 일자리를 지키는 일인 셈이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기술보호를 기업과 정부 어느 한쪽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기업은 내부통제와 보안체계를 강화하고 인재가 떠나지 않는 조직을 만들어야 하며, 정부는 국가핵심기술을 체계적으로 지정·관리하고 법과 제도를 현실에 맞게 정비해야 한다. 연구자와 기술자 역시 자신이 보유한 기술이 국가와 산업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기술패권 경쟁에서 승자는 더 많은 기술을 가진 국가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기술을 지키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국가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술유출과 국가위기관리’는 기술유출을 기업의 보안 문제에서 국가안보의 문제로 확장해 바라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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