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대형 전투함 놓고 양사 총력전
소송·전기추진 리스크도 여전히 변수
지난 11일 방위사업청은 한국형 차기구축함(KDDX) 상세설계·선도함 건조 사업 제안서 평가 결과를 통보했다.
한화오션이 HD현대중공업을 0.5867점 차로 근소하게 앞섰다. 총사업비가 7조원이 넘는 한국 해군 사상 최대 규모의 함정 사업이 1점도 채 안되는 차이로 결정됐다.
하지만 숫자의 뒷면에 있는 현실은 복잡하다. 기술 평가에선 HD현대중공업이 근소하게 앞섰다.
최종순위를 뒤집은 것은 13년 전 불거진 군사기밀유출 사건에서 비롯된 보안감점 1.2점이었다. 기밀유출사건이 10여년이 지나도록 KDDX의 핵심 변수가 됐다는 것은 두 업체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보여준다.
KDDX 사업의 진행 과정은 방위력 개선 사업 수주 경쟁의 승패를 넘어, K방산 생태계의 구조를 둘러싼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제안서 평가 결과가 최종 확정되면, 해상 분야 방위산업의 주도권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여곡절 거듭한 KDDX
KDDX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국산 이지스급 구축함’이다.
해군이 도입한 이지스구축함들은 미국 록히드마틴의 이지스 전투체계와 레이더 등을 사용한다.
반면 KDDX는 선체·전투체계·다기능레이더·수직발사체계(VLS)·통합마스트 등을 국내 기술로 체계통합한다. 6000t급 구축함 6척을 2036년까지 전력화하는 것이 목표다.
KDDX 개념설계는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기본설계는 HD 현대중공업이 실시했다. 이번 계약 범위는 상세설계와 선도함(1번함) 건조다. 확정 예산은 8820억 9900만 원, 사업기간은 계약 후 71개월, 선도함 인도 목표는 2032년 말이다.
기본설계는 2023년에 끝났다. 함정 건조 관례상 HD현대중공업이 수의계약을 수주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나, 기밀유출 문제가 불거지면서 논란이 증폭됐다.
갈등의 시작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HD현대중공업 직원들이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의 KDDX 개념설계도 등 기밀 12건을 불법 취득해 내부망에 공유했다. 9명이 기소돼 8명은 2022년 11월, 1명은 2023년 12월 유죄가 확정됐다.
이 사건은 KDDX 사업에 두 가지 특징을 남겼다. 방위사업청은 이를 근거로 보안감점을 부과했다. 한화오션은 군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 군사기밀 유출 사건의 피해자라는 명분을 얻게 됐다.
이 두 가지는 KDDX 사업 진행 과정에서 불거진 논란과 후속 조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기존 관행대로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를 수의계약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주장과 기밀 유출의 중대성 등을 감안해 경쟁입찰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하면서 방위사업청은 사업 절차를 진행하지 못했다.
KDDX는 사업 일정이 지연되면서 표류할 기미를 보이기도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지난해 12월 이재명 대통령이 “기밀을 빼돌려 처벌받은 데다 수의계약을 주느니 하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잘 체크해보라”라고 발언을 했고, 같은 달 정부는 지명경쟁입찰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업계에선 경쟁입찰이 진행되어도 HD현대중공업이 우위에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기본설계 과정에서 KDDX에 사용될 관급·도급 장비 규모를 파악할 수 있어서 공급망을 사전에 구축할 여유가 있었다는 평가다.
세종·정조대왕급 이지스구축함 건조 경험을 갖고 있었고, 기본설계를 통해 전자장비와 추진체계 등의 통합 문제도 사전에 점검할 수 있었으므로 HD현대중공업이 유리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2013년의 기밀유출 문제와 보안감점이 불거졌다.
해당 벌점은 2022년 판결 기준으로 적용 기한이 정해졌지만, 방위사업청은 최종 유죄 선고 시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지난해 재검토를 거쳐 2022년 확정 사건과 2023년 확정 사건을 분리해 감점을 적용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이에 따라 보안감점 적용 기한이 연장됐다.
HD현대중공업은 법원에 보안 감점 연장 적용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법원은 지난 5일 이를 기각했다. 11일 KDDX 제안서 평가 결과는 한화오션에 유리하게 나왔고, HD현대중공업은 11일 즉시 항고를 신청했다.
이를 두고 논란도 빚어지고 있다. 첨단 전투함정 건조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보안감점으로 기술력 평가가 밀렸다는 반발이 나오고 있다. 반면 사업 절차와 기밀 유지의 중요성 등을 감안하면 보안 감점은 정당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고강도 경쟁 이유는
첨단 전투함 건조 사업의 승패가 기술과 건조 능력보다도 13년 전의 기밀유출 사건에 의해 결정됐다는 것은 그만큼 양측간 경쟁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의미다.
KDDX는 한국 해군이 추진하는 사실상 마지막 대형 전투함 사업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 6척을 건조할 울산급 배치-Ⅳ 호위함은 배수량이 4,300t으로 KDDX보다 작고, 현재 2척이 건조중이다.
해양정보함도 1∼2척 정도이며, 무인기를 탑재하는 유·무인복합체계 모함은 2040년대에 실용화될 예정이다. 연안초계함은 본격적인 사업화 단계에 접어들지 못했고, 배수량도 2000t 안팎의 소형 함정이다.
수출 물량을 제외하면 KDDX 이후 국내에서 대형전투함 건조 사업은 당분간 눈에 띄지 않는 셈이다.
HD현대중공업은 필리핀·페루와 군함 수출 계약을 맺었지만, 첨단 기술이 대거 포함된 고부가가치 함정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다. 한화오션도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건조 이후 구축함을 만들 기회를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한화오션이 최종적으로 상세설계 및 선도함 사업자로 선정되면, KDDX의 기술 표준을 결정하면서 후속함(2∼6번함) 수주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얻게 된다.
이지스구축함 건조에서도 1번함 세종대왕함을 만든 HD현대중공업이 전체 6척 중 5척을 수주했고, 장보고-Ⅲ 잠수함도 1번함 도산안창호함을 건조한 한화오션이 6척 중 5척을 만들었다.
HD현대중공업이 마스가(MASGA) 등과 관련, 이지스구축함 건조 경험을 앞세웠던 것처럼 한화오션도 ‘한국형 이지스함 건조사’라는 타이틀을 내세울 수 있게 된다. 이는 향후 수십년에 걸친 함정 수출 경쟁에서 긍정적인 브랜드 자산이 된다.
KDDX가 한화그룹의 방산 수직 계열화를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KDDX 통합마스트와 다기능레이더, 전투체계는 한화시스템이 만든다. 여기에 함정 건조를 한화오션이 맡게 되면, KDDX 사업을 통해서 한화 그룹 방산 역량이 가치사슬로 묶인다.
◆남은 리스크는
제안서 평가가 끝났지만 KDDX 사업을 둘러싼 리스크는 여전히 크다.
HD현대중공업이 항고에 이어 본안 소송까지 제기하면 절차 지연 가능성이 커지고, 일정이 지연될 수 있다.
방위사업청은 관련 절차를 진행한다는 방침이지만 법원 판단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우려도 있다. 후속함 건조 방식과 사업비 현실화 문제도 과제다.
기술 리스크도 만만치 않다. 한화오션은 기본설계를 수행하지 않은 채 상세설계에 뛰어들어야 한다. 기본설계 자료가 있지만, 설계를 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과 경험까지 넘겨받기는 어렵다.
이는 KDDX에 채택되는 통합전기추진체계(IFEP)와 맞물려 리스크를 더욱 높인다.
KDDX는 국내 전투함 중 최초로 통합전기추진체계를 쓴다. 저속구간에선 디젤발전기를, 중속구간에선 가스터빈을, 고속구간에선 이를 모두 사용해서 배를 움직이고 함 내부에 전력을 공급한다. KDDX는 미국 줌월트급 구축함 다음으로 큰 25㎿급 발전용량 체계를 쓸 예정이다.
이를 통해 항해 소음을 낮춰서 대잠수함 작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고, 대용량 전력을 공급해 다기능레이더와 전투체계, 전자전 장비 등을 가동하면서 레이저 무기 등의 탑재도 가능하도록 한다.
장점은 분명하지만, 기술적 난도가 높다. 단일 전력망에서 항해 추진 전력, 레이더·무장 전력, 전투체계 전력을 실시간 분배·관리하는 전력관리시스템이 높은 수준으로 가동되어야 한다.
수입에 의존할 KDDX의 가스터빈과 추진체계의 납기 준수 및 국산 장비와의 통합 여부 등도 문제가 될 수 있다.
KDDX와 유사한 통합 전기추진체계를 사용한 영국 해군 45형 구축함의 경우 페르시아만에서 터빈 과열로 전력이 상실되어 항해 불능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결국 영국 해군은 개선사업을 진행, 발전체계를 교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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