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열망이 여론 방향을 결정
기후위기 논쟁선 ‘내 이득’ 우선
6·3 지선도 정책보단 실언 주목
성숙한 민주주의는 공감서 출발
감정사회/마렌 우르너/마정현 옮김/다람/1만8800원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를 이성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선거와 정책 결정은 사실과 데이터, 논리적 토론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독일의 신경과학자이자 과학 저널리스트인 마렌 우르너는 ‘감정사회’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간은 순수한 이성에 따라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에 의해 세상을 해석하고 결정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정치적 선택과 사회적 판단 등 중요한 결정은 실제로 감정과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감정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의 본류는 본질에서 서로 다른 감정을 조율하고 이를 공동의 가치와 이상으로 연결하는 협치의 과정이 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미래를 보다 근사하고 살기 좋은 방향으로 만들려면 근본적으로 관점을 바꿔야 한다. 이를테면 사회·정치적 토론에서 감정은 믿을 수 없으며 믿어서도 안 된다는 통념은, 직설적으로 말하면 헛소리에 가깝다. 감정은 전문적이거나 정치적인 영역에서 분리할 수 있는 사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은 우리의 공동생활을 형성하며, 나아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정치적 공간을 결정짓는다.”(18쪽)
저자의 이러한 주장이 주목받는 이유는 최근 세계 정치의 여러 현상을 설명하는 데 상당한 설득력을 갖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일 사회를 뜨겁게 달군 건물에너지법(GEG), 이른바 ‘난방법’ 논쟁을 대표적 사례로 제시한다.
이 법의 본질은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에너지 전환 정책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관심은 기후 문제보다 “내 집 보일러를 바꿔야 하는가”,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가”에 집중됐다. 정책의 과학적 타당성보다 재정적 부담에 대한 불안과 국가가 개인의 삶에 개입한다는 위협감이 여론을 움직였다. 사람들은 숫자와 통계를 두고 논쟁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불안이라는 감정에 반응하고 있었다.
기후위기를 바라보는 태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독일 국민 다수는 기후 중립 사회에는 찬성하지만, 노후 화석연료 보일러를 친환경 설비로 의무 교체하는 정책에는 반대한다. 기후위기 해결이라는 목표에는 동의하지만 자신의 생활방식이 바뀌거나 비용이 발생하는 순간 거부감이 생기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인지부조화의 사례로 설명한다. 마치 “살은 빼고 싶지만, 운동은 하기 싫다”는 태도와 같다.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지만 감정적으로는 충분히 이해 가능한 반응이다. 변화가 가져올 불편함과 익숙한 삶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판단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양극화 역시 감정의 문제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논쟁이 단순히 의견 차이나 정책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정치적 입장은 곧 정체성과 연결된다. 따라서 상대방의 반대 의견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공격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진영에 소속감을 느끼고, 그 소속감을 지키기 위해 더욱 강하게 상대를 적대시한다. 그 결과 논쟁은 뜨거워지고 감정적 상처는 깊어지며 사회 전체의 의사결정은 오히려 비합리적으로 변한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도 낯설지 않다. 최근 치러진 6·3 지방선거에서도 후보의 정책보다 실언이나 막말이 더 큰 화제가 됐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사실 확인이 끝나기도 전에 분노가 먼저 확산됐다. 특정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사실관계보다 먼저 감정적 진영을 선택한다. 사건 자체보다 ‘우리 편인가, 상대편인가’가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억누르거나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인정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감정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로 감정은 인간 판단의 출발점이다.
문제는 감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데 있다.
억눌린 감정은 물속에 눌러 놓은 공과 같다. 잠시 가라앉힐 수는 있지만 결국 더 큰 힘으로 떠오른다. 증오와 혐오 역시 대개 불안과 두려움, 상실감 같은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따라서 감정을 다룬다는 것은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과정이다.
저자의 강조점은 ‘감정적 성숙’이다. 이는 감정을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자유로운 결정 역시 아무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으로 불안을 느끼는지, 어떤 욕구가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인식할 때 비로소 장기적으로 더 나은 선택이 가능해진다.
감정을 이해하는 일은 이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이성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며, 민주주의가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도 사실과 논리만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성찰하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려는 시민적 역량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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