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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끝을 알면서도… 뚜벅뚜벅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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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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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 장편소설 ‘겨울통’

말을 잃은 인하에게
사랑을 느끼는 동아
어렵게 마음을 열 때쯤
‘겨울통’ 바이러스로
동아는 녹아버리는데

‘겨울’과 ‘통증’
싫지만 좋고,
괴롭지만 무릅쓰고 싶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놀라운 상상력과
언어로 조각해내

처음에는 막연히 겨울에 대한 소설을 한 편 써보고 싶었다. 물론 겨울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추위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싫은데 좋고, 괴로운데 ‘무릅쓰고’ 싶은 것. ‘겨울’과 ‘통증’을 함께 생각했고, 곧이어 ‘겨울통’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끝을 알지만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면 좋겠다는 생각도.

사람들 사이라면 이런 게 무엇이 있을까? 서로를 놓지 못하는 연인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끝을 받아들이는 좋은 이별 이야기. 소설가 정용준은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글을 써가는 동안, 점점 더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완전 변태’를 하는 생물의 생태를 알게 됐다.

17년 차의 ‘젊은’ 소설가 정용준이 사랑이라는 감정의 형상을 놀라운 상상력으로 조각해 나간 신작 장편소설 ‘겨울통’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소설 속 인물, 그 한 사람을 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자기 윤리와 자기 미학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작가 제공
17년 차의 ‘젊은’ 소설가 정용준이 사랑이라는 감정의 형상을 놀라운 상상력으로 조각해 나간 신작 장편소설 ‘겨울통’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소설 속 인물, 그 한 사람을 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자기 윤리와 자기 미학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작가 제공

…번데기가 되면 껍질 안쪽의 상태가 모두 액체로 변한다, 주어진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커지거나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이 아닌 완전히 녹아 다른 몸이 된다, 그럼에도 그 육체가 지니고 있던 기질이나 정신 혹은 본질은 유지된다….

번데기의 생태는 놀라웠고, 시적이고 아름다웠다. 막연하게 갖고 있던 ‘몸’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개념과 한계를 수정했고, ‘변화’라는 범위와 상상도 고쳐 생각하게 됐다. ‘인간의 변화와 성장도 이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이 아닌, 살아 있으면서 다시 살아나는…. 감정과 경험, 미래의 언어와 표현까지도 모두 액체가 되어 다르게 생성되기를. 픽션의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믿고 그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젊은 소설가 정용준이 ‘언어’라는 화두를 바탕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의 형상을 놀라운 상상력으로 조각해 나간 신작 장편소설 ‘겨울통’(은행나무)을 발표했다. 아동 학대 문제를 다룬 장편 ‘너에게 묻는다’ 발표 1년 만이다.

이야기는 남쪽의 소도시 ‘소랑’에서 시작된다. 소랑도서관의 레지던시 작가로 머물고 있는 인하는 언어장애로 말을 할 수 없다. 대신 패드에 입력한 문장을 디지털 음성으로 변환해 세상과 소통한다. 대학 조소과에서 촉망받던 루키였지만 대학원 내 복잡한 이해관계에 밀려난 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소랑에서 생활하고 있다.

“말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말이 불가능해. 소리를 낼 수는 있지만 의미 있는 소리를 낼 순 없어. 노력하면 단어 정도는 발음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 앞에서 잘못된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의도치 않은 말을 하게 될까봐 걱정돼. 오해도 싫고, 해명하는 것도 싫어. 그래서 말 자체를 하지 않게 된 거야.”

시를 쓰는 동아는 인하와 도서관의 ‘내 이야기 내 책 만들기’ 프로젝트를 함께하며 느린 속도로 그에게 다가간다. 디지털 음성 대신 느릿한 필담을 건네며 인하가 스스로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기를 기다린다.

필담과 시를 매개로 가까워진 인하가 마음의 빗장을 풀 즈음, 동아는 ‘겨울통’이라는 희한한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전신 겨울통 환자였던 동아는 온몸을 잃고 투명한 액체가 되어간다. 하지만 인하는 동아를 포기하지 않는다. 동아를 되살리기 위해, 한때 동아였던 액체를 품고 핀란드로 향하는데. 인하는 과연 녹아내린 동아를 살려낼 수 있을까. 17년차의 ‘젊은’ 소설가 정용준은 왜 자발적 고립의 시대에 다시 사랑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그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는 어떤 모습일까. 작가적 여로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정 작가를 최근 이메일과 전화로 만났다.

―소설의 배경은 작은 도시 ‘소랑’과 소랑도서관인데, 이름을 처음 듣는데도 무척 인상적입니다.

“항상 도서관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많은 이가 책을 좋아하도록 노력하는 사람들. 책이라는 물성을 아름답게 여기며 소중하게 관리하는 이들. 사서와 독자와 작가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배경을 써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도서관을 주무대로 삼는 소설이 된 것입니다. ‘소랑’이라는 지명은 제 감각 속에선 남해의 어느 작은 마을을 떠올렸는데요. 잔잔해 보이지만 위험한 파도를 감추고 있는 이미지를 떠올렸어요. 그렇게 ‘소랑’이라는 지명이 되었죠. ‘바다’와 ‘도서관’ 둘 모두 저의 낭만이었어요.”

―사랑에 빠진 동아가 앓게 되는 ‘겨울통’이라는 발상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발상이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얼었다가 녹는 이미지는 제가 참 좋아하고 자주 떠올리는 상상입니다. 예전 ‘바벨’이라는 소설에서는 말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나라를 상상한 적도 있지요. 겨울과 통증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얼고 녹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겨울통의 구체적인 증상에 관해서는 소설을 구상하다가 구성하게 되었지만, 발상 자체는 얼고 녹는 겨울의 속성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얼었다가 녹으면 그대로 회복되는 것이 있고 변하는 것이 있고 상하는 것이 있죠. 그것을 인간의 육체에 대입해 이렇게 저렇게 상상했더니 지금의 설정이 되었어요.”

―자발적 고립 시대라고 불리기도 하는 우리 시대에 사랑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개인적으론 가끔 회의적일 때도 있거든요.

“전통적 의미로서의 ‘사랑’은 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느낌보다 부정적인 느낌이 훨씬 더 크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때문에 두렵고 불안합니다. 거절에 대한 공포. 상처에 대한 공포. 남겨질까봐. 버려질까봐. 나만 좋아할까봐. 나만 바보가 될까봐. 걱정하느라 시도 자체를 포기하는 시대가 된 것 같아요. 원하지 않으면 잃을 것도 없으니까 모두 영(0)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현대인의 표상이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잃을까봐 두려워 원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인하에게 투영된 것 같아요.”

1981년 광주에서 나고 자란 정용준은 2009년 단편소설 ‘굿나잇, 오블로’가 ‘현대문학’에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바벨’, ‘프롬 토니오’, ‘내가 말하고 있잖아’, ‘너에게 묻는다’ 등을, 중편소설 ‘유령’, ‘세계의 호수’ 등을, 소설집 ‘가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선릉 산책’ 등을 발표했다. 젊은작가상, 황순원문학상, 문지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용준은 소설만 쓰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강의도 한다. 하루 대부분은 일상의 일을 충실히 행하는 것에 전념한다. 출근하고, 강의 준비하고, 이런저런 성가신 문서 작업을 하고, 집에 돌아와선 아이들을 케어하고 대화하고, 보호자로서 필요한 것을 돕고 해결하고…. 여기까진 작가로서의 특별함이 없다.

하지만 일과 일 사이의 틈이나 멍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들, 일상과 의무가 모두 종료된 깊은 밤이면 문학적인 생각을 한다.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탈 때는 가급적 읽으려 하고 모호한 이야기를 구체화하려 노력한다. 지루한 회의나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대기해야 할 때면 힘을 다해 멍 때리면서 다른 세계와 다른 감각에 전념하려 애쓰고. 그리하여 홀로 고립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으면 문장을 쓴다. 일상과 일상 사이에 놓인 그 문학적 시공간에는 우리의 동아와 인하도 있다. 아직 사랑의 힘을 믿고, 포기하지 않는, 아니 맹렬한.

 

“이상하게도 너는 갖고 싶더라. 곁에 두고 싶더라고. 그런데 나 요즘 또 그런 기분에 시달리고 있어. 널 잃게 될까봐, 갑자기 사라질까봐, 빈자리를 우두커니 바라보는 그 끔찍한 삶으로 돌아가게 될까봐, 작은 방이 다시 빈방이 될까봐 두려워.”(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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