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 확대 등 경제 낙수효과 미미
반도체 경기의 전례 없는 호황으로 한국 경제가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그 성과가 고용 확대나 소득 증대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수억원의 성과급을 받은 임직원이나 코스피 호황을 누린 투자자를 제외하면, 반도체를 통한 경제 전반의 낙수효과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반도체로의 과도한 편중 속에 고물가·고금리의 부담이 더해지며, 성장 불균형이 심화하는 ‘K자형 양극화’가 지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31일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4월 제조업 생산지수(원지수)는 전년 동기 대비 1.6% 상승했다. 중동사태에 따른 공급망 불안 속에서도 반도체를 중심으로 하는 제조업이 선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반도체의 경우 생산지수가 전년 대비 13.0% 뛰었다. 하지만 반도체를 제외한 제조업의 생산지수를 보면 4월 기준으로 전년 대비 1.2%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1∼4월 평균으로 봐도 제조업 생산지수가 2.7% 올랐지만, 반도체를 빼면 0.7% 오르는 데 그쳤다.
고용으로 보면 반도체 효과는 미미한 수준이다. 지난해 4분기 반도체 제조업의 임금 근로 일자리 수는 17만2000개로 전년 대비 3000개(1.9%) 늘었다. 지난해 반도체 제조업 생산이 12.8% 증가한 것을 고려하면, 생산 증가에 비례하는 고용 확대로는 이어지지 않은 셈이다. 지난해 4분기 기준 전체 제조업 임금 근로 일자리 430만7000개 중 반도체 제조업의 임금 근로 일자리 수는 4.0%에 그쳤다.
‘일자리 없는 성장’ 실질소득·성장률 격차 키워
일자리 없는 성장이 지속되면서 1분기 가계의 실질 소득은 월평균 462만8718원으로 전년 대비 0.4% 증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실질 소득 증가율은 지난해 1분기 2.3%를 기록한 뒤 2분기 0%로 보합세를 보이다가, 3분기에 1.5%, 4분기에 1.6%로 확대됐다. 그러나 올해 1분기에는 0%대로 다시 주저앉았다.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전년 대비 3.6%로 ‘깜짝 성장’을 이뤘다는 점에서 실질 소득과 경제 성장률 간의 격차가 크게 벌어진 것이다.
실질 소득 증가율과 경제 성장률 간의 격차를 단순 계산하면 지난해 1분기엔 실질 소득 증가율이 2.3%포인트 앞섰다. 그러나 2분기엔 경제 성장률이 0.6%포인트 앞섰고, 이 격차가 3분기 0.3%포인트, 4분기 0%포인트, 올해 1분기 3.2%포인트로 확대된 것이다.
실질 소득 가운데 실질 근로소득은 1.7% 줄었다. 1분기 기준으론 2024년(-4.0%)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자영업자 소득인 실질 사업소득은 1분기 기준으론 2023년(-10.9%) 이후 가장 낮은 0.5% 증가하는 데 그쳤다.
상위 20%(5분위)의 소득을 하위 20%(1분위)의 소득으로 나눈 값인 균등화처분가능소득 5분위 배율은 6.59배로 2020년 1분기(6.89배) 이후 가장 높게 나타났다. 5분위 배율의 수치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분배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전체 소득에서 5분위가 차지하는 소득 점유율은 45.2%로 2023년(45.5%)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
그 사이 가계의 살림은 더 빠듯해졌다. 1분기에 1분위 가구의 실질 흑자액은 -43만8000원으로 집계됐다. 1분기 기준으론 2019년 통계 작성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적자다. 흑자액은 세금 등을 제외한 처분가능소득에서 소비지출을 뺀 값인데, 마이너스를 기록했다는 것은 가계의 소득만으로 지출을 충당하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 반면 1분기에 5분위의 실질 흑자액은 344만5000원으로 1분기 기준 2022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1분위와 5분위의 흑자액 격차는 소득과 소비 흐름에 기인했다. 1분위 가구의 경우 소득이 정체된 반면 지출이 늘면서 적자가 확대됐다. 1분위의 실질 처분가능소득은 79만2000원으로 전년 대비 0.1% 감소했는데, 실질 소비지출은 123만1000원으로 5.1% 늘었다. 식료품(3.3%)과 보건(6.5%) 등의 필수 지출이 증가했고, 교통·운송(33.8%), 오락·문화(23.4%) 등의 선택적 소비도 늘었다. 반면 5분위에선 실질 처분가능소득이 814만6000원으로 3.0% 늘었고, 실질 소비지출은 470만원으로 4.8%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흐름이 지속될 경우 양극화가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중동사태에 따른 물가 상승이 저소득층의 소비지출 부담을 늘리고, 고소득층에선 나홀로 소득 여건이 개선되는 K자형 양극화가 심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준모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반도체 투자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연관 산업을 키웠어야 하는데, 각종 규제로 인해 투자가 활발하게 이뤄지지 못했다”며 “특히 고용 경직성을 해소했다면 더 많은 고용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성진 고려대 교수(경제학)는 “이미 물가가 오른 상태에서 정부가 경기진작을 위한 정책을 쓰긴 어렵다”며 “청년층을 비롯한 취약계층의 일자리를 늘려서 소득 격차를 좁히는 것이 양극화 극복에 가장 빠른 대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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