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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때로 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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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잃고 美로 이민 온 주인공
언어 장벽 앞에 무너지는 존엄
가끔은 애써서 살아내는 날들
혹한 속 백조처럼 기다리는 봄

조슬린 니콜 존슨 ‘산드라의 왕’(‘나의 몬티셀로’에 수록, 강동혁 옮김, 문학동네)

이제는 떠나온 문창과 학생에게 메일을 한 통 받았는데 언젠가 수업 시간에 내가 학생들에게 요즘은 무엇에 애를 쓰고 있느냐는 질문을 한 모양이다. 흐릿하지만 소설 쓰는 데, 먹고 자는 데, 아르바이트하기에 등 여러 목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그 질문을 한 이유는 ‘애쓰다’라는 동사를 개인적으로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그즈음 애쓰며 글 쓰고 싶고 애쓰며 생활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서였던 것 같다. 어느 땐 이 질문을 바꾸어서 지금 떠오르는 동사가 무엇이냐고 묻기도 한다. 학기 초에 들은 학생의 대답이 잊히지 않는다.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살다’.

조경란 소설가
조경란 소설가

가끔은 애를 써서 살아가야 하는 시기, 살아갈 이유를 애써서 만들고 찾아야 하는 시간이 있지 않나. 오늘, 아타 씨도 그렇다. 아내가 폭탄 테러의 희생자로 세상을 떠나자 아타 씨는 더는 나이지리아에서 살 수가 없어 아들과 딸을 데리고 여기 미국 버지니아주의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로 이민을 왔다. 망명지처럼 느껴지는 곳이지만 아들 이름이 알렉스여서 언어가 자유롭지 못한 아타 씨에게는 ‘산드라’로 부를 수 있는 장소. 아타 씨에게 열세 살 중학생인 아들은 “유일한 희망”이다. 그 애가 야구모자를 하나 써도 꼭 왕관을 쓴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 애가 여기에서 빛을 발하게 되는 날이 오면 고향에서 번듯한 집과 직장을 가졌을 때처럼 자신에게도 한 가닥 위엄이 생길 거다. 그런데 지금 아타 씨는 교장실에 불려 와 있다.

교장과 선생은 아타 씨에게 말한다. 알렉스가 부족하고 학습장애 판정을 받을 수 있으니 ‘추가 지원’이 필요하다고. 아타 씨는 그들이 하는 말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없다. 언어의 문제 그리고 이미 자신에게는 그 상태로 완벽해 보이는 아들에게 결함이 있다는 그들의 지적을. 아들은 엄마에게 사고가 일어났을 때 옆에 있었다. 그렇게나 큰 상처가 있는 아들인데. 아타 씨는 그들의 시선을 느낀다. 자제력을 잃은 자신을 약간은 두려워하는 눈과 동정 어린 시선. “인간이 아니라 덤불 속의 멧돼지라도 되는 것처럼” 보는 눈. 교장은 경찰을 부를 태세다. 아타 씨는 일단 교장실을 나왔지만 갈 데가 없다. 집에는 자신이 실직한 사실을 모르는 딸이 아르바이트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렇게 날씨가 추워지기 전까지만 해도 아타 씨는 옛 직장 근처의 연못에 자주 갔다. 벤치에 앉아 구직에 실패한 하루치의 감정을 털어내려고. 연못에는 툰드라 백조 무리가 있었다. 아타 씨 짐작으로는 이동하던 중 길을 잃고 실수로 이 연못에 내려앉은 게 틀림없어 보이는, 새하얀 깃털로 더러운 연못을 초연하게 가로지르는. 버지니아주는 너무 일찍부터 추워졌다. 지난번에 지나가다 보니 백조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타 씨는 새들이 더 따뜻하고 살기 좋은 땅으로 날아갔다고 믿고 싶지만 어쩐지 포획당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지울 수 없다. 자신처럼 여기 살아남기 위해 적응하지 못한 거라고. 낡은 차 안에 있다가 아타 씨는 다시 교장실로 간다. 이번에는 알렉스도 왔다. 자신에게는 산드라의 왕 같은 아들이 기가 죽은 소리로 말했다. 읽기도 수학도 전혀 못하니 추가 수업을 받게 해달라고.

아타 씨는 혼란과 슬픔 속에 혼자 남겨졌다. 씻을 수 없는 일을 겪은 자식들을 안전한 장소로 옮겨놓고 싶었는데 여기선 언어도 경제적인 위치도 자신의 존엄도 모두 사라지고 더는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처 없이 차를 몰다가 아타 씨는 옛 직장으로 들어가는 교차로를 지났다. 언뜻 “밝은 빛”이 보인다. 백조들. 사라지고 포획당한 줄 알았던, 자신과 동일시했던 백조들이 추위에 서로 착 달라붙어 여전히 물 위에 있었다. 따뜻해질 날을 기다리듯. 백조 무리의 흰빛과 우아함 때문인지 “최소한 봄까지는 버틸 것” 같아 보인다. 작가는 여기서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제목인 ‘산드라의 왕’이 아들에서 백조로 변주되는 순간을. 애써서라도 그렇게 보려는 사람, 절박한 한 사람을 더 살고 싶게 해주고 버티게 만들어주는 존재는 마땅히 왕으로 불려도 좋으리라.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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