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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언제나 치세요” 서울 광화문 길거리 피아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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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선임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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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악사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헌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될 정도로 오랜 풍경이다. 다만 덩치나 무게가 남다른 피아노는 좀 다르다. 1920년 8월 미국 뉴욕에서 포드 차량에 업라이트 피아노를 싣고 군중 앞에서 연주했다는 이색 뉴스가 신문에 실렸을 정도다. 누구나 자유롭게 칠 수 있는 공공 피아노가 등장한 건 2008년 ‘플레이 미, 아임 유어스’ 프로젝트 이후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공공장소에 피아노가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오세훈 서울시장 아이디어로 2023년 10월 세종문화회관 라운지 입구에 설치된 피아노에는 다양한 사연이 쌓이고 있다. 컨설팅업체 오스카 주상수 고문도 출근시간대 이곳을 지나는 이들에겐 익숙한 연주자다. 다음은 세계일보가 지난 11일 세종문화회관 라운지 앞에서 만나 들은 주상수씨의 피아노 이야기.

 

세종문화회관 세종라운지 입구에는 누구나 언제나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가 있다. 그 피아노를 주상수씨가 11일 오전 연주하고 있다. 최상수 기자
세종문화회관 세종라운지 입구에는 누구나 언제나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가 있다. 그 피아노를 주상수씨가 11일 오전 연주하고 있다. 최상수 기자

◆“저는 피아노를 칩니다.”

 

증권회사에서 33년을 일하다 지난해 12월에 퇴직한 주상수입니다. 원래 하던 일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시장에 들어올 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제 영업, 그러니까 브로커리지 업무였습니다. 중간에 8년은 홍콩 법인에 나가서 근무하기도 했고요. IB 쪽 일도 경험했습니다. 전공은 경제학이었고, 지금은 작은 컨설팅 회사에서 고문으로 자산관리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피아노를 칩니다. 피아노는 다섯 살 때 시작했습니다. 피아노를 배우던 두 살 위 누나 어깨너머로 익혔습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저까지 레슨을 받기는 어려웠거든요. 그러다 피아노 학원도 다니고, 초등학교 절친 소개로 선화예중에 피아노 전공으로 들어갔습니다. 선화예중에 들어갈 당시 제 실력은 체르니 40번 초입 정도였고, 입시 시험 곡은 모차르트 소나타 5번이었습니다. 동기 중에 발레리나 강수진도 있었죠.

 

선화예중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레슨을 받았는데, 선생님이 아주 훌륭한 분이셨어요. 그런데 전공으로 계속 가겠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열심히 치지 않았습니다. 그게 지금도 좀 아쉽습니다. 훌륭한 선생님 앞에서 제대로 치지 못한 게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피아노를 놓았습니다. 그게 무려 40년 가까이 됩니다.

 

피아노 앞에 다시 앉게 된 건 아마 2020~2021년쯤인 것 같습니다. 여의도 근무할 때 IFC몰에 공공 피아노가 놓여 있는 걸 발견했어요. 점심시간에 한 곡씩 치는 게 재밌었습니다. 10~20분씩 치면 사람들이 박수도 쳐주고. ‘세상에, 이런 게 있구나! ’싶었어요.

 

그러다 집 근처여서 세종문화회관을 오가다 보니 라운지에 피아노가 있는 걸 보게 됐습니다. 한 2년 반 전이에요. ‘아무나 치세요’라고 쓰여 있길래 ‘야, 우리나라도 문화 선진국이구나’ 싶었습니다. 가끔 오다가다 치기 시작한거죠,

 

사람들 앞에서 치는 게 부담스럽지 않냐? 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주목받고 싶어서 치는 게 아니라 연주하는 게 좋아서 치는 거니까요. 그래도 ‘더 잘 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피아노 학원에 등록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레슨을 받고 있습니다.

 

주로 치는 곡은 한 10곡 정도입니다. 그 이상은 안 해요. 악보를 들고 다니기 싫고, 기본적으로 암보로 치는 편인데 아마추어가 10곡 이상을 외워서 치기는 어렵더라고요. 그것만 계속 치는 거죠.

 

주상수씨는 자신의 피아노 연주 영상에 누군가 달아준 “삶의 용기를 얻었다”는 댓글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최상수 기자
주상수씨는 자신의 피아노 연주 영상에 누군가 달아준 “삶의 용기를 얻었다”는 댓글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최상수 기자 

◆‘템페스트’ ‘비창’

 

베토벤 소나타를 주로 칩니다. 17번 ‘템페스트’ 1악장, 27번 1악장, 8번 ‘비창’ 3악장. 선생님이 “베토벤이 맞는다”고 하시더라고요. 저 자신이 변동성이 심한 편이에요. 조용했다가 커졌다가, 조용했다가 커졌다가. 그런 제 터치 방식이 베토벤 소나타와 결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원래 피아노 교육의 정규 코스가 모차르트, 베토벤을 거쳐 쇼팽으로 올라가잖아요. 저는 거기서 쇼팽으로 못 넘어간 거예요. 정규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사람이니까. 쇼팽 어려운 거 치는 분들 보면 참 부럽습니다. 그렇다고 치열하게 연습해서 거기까지 가겠다는 욕심보다는 원래 치던 걸 잘 치자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 외에는 귀로 듣고 즉흥으로 편곡해서 치는 걸 즐깁니다. 유행가, 트로트, 경음악, ‘마이 웨이’ 같은 팝송들. 악보 없이 생각나는 대로 치면 어떤 때는 두 시간쯤 칩니다.

 

◆버스킹 풍경

 

집이 가까우니 새벽 3~4시에 잠이 깨는 날에는 5시쯤 나와서 치기도 합니다. 그때가 아무도 없고 정말 좋아요. 깜깜하고 조용하고, 차 소리가 조금씩 나고. 피아노를 치는데 까마귀나 비둘기가 와서 옆에 앉을 때가 있어요. 아주 드물게 고양이가 옆에 오는 경우도 있고.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럴 때가 정말 좋습니다. 겨울에는 추워서 핫팩을 하나 갖고 나오죠. 

 

저녁에는 연주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분위기입니다. 자주 만나 안면이 있는 분들이 한 10명쯤 되는데, 그중 8명 정도는 수준 있는 연주자들입니다.

 

음대 작곡과 교수로 은퇴하시고 지금은 반주로 생업을 하시면서 꾸준히 나오시는 분도 있고, 집이 멀어도 여기까지 오셔서 치시는 분도 있어요. 버스킹 자체가 업인 분도 계십니다. 서울 내 스무 군데가 넘는 공공 피아노를 돌아다니시며 매일 유튜브에 조금씩 올리시는 분이에요. 

 

러시아 연주자도 한 분 계셨는데 진짜 잘 치셨어요. 요즘은 안 보이시는 걸 보면 러시아로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레퍼토리는 거의 클래식이 대부분이고, 간혹 재즈 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들 순하고 선해요. 기다리다 어떨 때는 “저도 좀 쳐도 될까요? ”하면 다들 흔쾌히 “치세요”하죠. 가끔 옆 카페 가서 차 한 잔씩 하기도 합니다.

 

한 분은 어릴 때 피아노를 오래 배워서 쇼팽까지 쳤는데, 집이 갑자기 망하면서 빨간 딱지가 붙었을 때 피아노부터 제일 먼저 가져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평생 한이 돼서 나이 들어서도 피아노치고 다니신다는 분을 만났습니다.

 

관객은 60~70대 할머니들이 말을 자주 붙이시는데, “이거 쳐주세요, 저거 쳐주세요. ”하시면 가끔 그 곡을 치기도 합니다. 2년 전쯤에는 관객이 비타500이나 라떼를 피아노 위에 올려놓고 가시는 경우도 있었어요. 요즘은 경기가 안 좋아서인지 좀 줄었지만.

 

한번은 밤에 혼자 나와서 운동권 가요만 쳤어요. 김민기 노래부터 시작해서 ‘임을 위한 행진곡’, ‘선봉에 서서’ 같은 노래를 악보 없이 즉흥으로. 50대 남자분이 다가오더니 여러 곡을 신청하다 나중에 맥주 한잔 하자고 하시는 거예요.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그냥 한잔 했습니다. 알고 보니 대학 노래패 출신의 스타트업 대표였어요.

 

서울문화재단의 ‘피아노 서울’. 서울문화재단 제공
서울문화재단의 ‘피아노 서울’. 서울문화재단 제공

◆서울의 공공 피아노

 

서울에 공공 피아노가 있는 곳이 제가 아는 것만 스무 군데가 넘습니다. 신당역, 서울숲, 서울로 7017, 동대문 DDP, 어린이대공원, 홍대 앞 신촌…. 인천공항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장소마다 개성이 있어요. 세종문화회관은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서 관객 주목도가 가장 높습니다. 서울숲, 신당역, 서울로 7017 같은 곳은 좀 고립돼 있어서, 오히려 혼자 조용히 치기에는 거기가 더 좋아요. DDP는 어느 정도 주목은 받을 수 있지만, 지나가는 길목에 자연스럽게 위치한 곳은 세종문화회관이 유일합니다.

 

피아노 관리 상태는 세종문화회관이 단연 최고입니다. 연주자들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 느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손보시는 것 같아요.

 

다른 곳들은 건반이 빠진 곳도 있고, 홍대 신촌 쪽에 있는 피아노는 비를 맞게 설치돼 있어서 상태가 안 좋고. 이탈리아 다녀오신 분 말씀으로는 유럽에는 오히려 공공 피아노가 별로 없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인터뷰 요청에 응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뒤뜰에 피아노를 한 대 더 놓아주면 좋겠습니다. 네 살, 다섯 살 아이들이 와서 아무거나 막 치는 게 얼마나 귀엽습니까. 외국인 관광객들이 연주를 경청하는 모습도 보기 좋고, 광화문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훌륭한 문화상품이자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집에 전자피아노가 있긴 해요. 그런데 가족은 집에서 피아노 치는 걸 싫어합니다. 헤드폰을 끼고 쳐도 터치 소리가 아랫집에 전달되거든요. 층간 소음 문제입니다.

 

요즘 집에서 주로 하는 게 세 가지예요. 아내와 산책하거나, 피아노 치러 나오거나, 동네 헬스장 가거나. 은퇴한 친구들이 많은데, 할 일 없을 때가 진짜 어렵다고들 해요. 시간은 많고 할 일이 없는 걸 두 글자로 하면 ‘권태’잖아요. 그게 제일 무섭습니다. 그래서 뭔가 계속 찾아야 돼요. 뇌에는 신경 가소성이 있어서 나이 들어도 계속 노력하면 성장한다는 걸 어디서 읽었는데, 악기 배우는 게 그 자극으로는 상당히 좋다고 합니다.

 

세종라운지 입구에 설치된 피아노를 연주중인 주상수씨. 최상수 기자
세종라운지 입구에 설치된 피아노를 연주중인 주상수씨. 최상수 기자

◆피아노를 치는 이유

 

사실 2010년 12월 아버지가 포르투갈 여행 중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팔순을 두 달 남겨놓고서요. 아버지 생신에 어딘가 모시고 가서 피아노를 쳐 드리겠다고 연습하던 참이었는데, 그게 끝내 이루지 못한 일이 됐습니다.

 

소리는 파동입니다. 초속 354m로 전달되는 파동이에요. 탁 터진 곳에서 피아노를 치면 어디선가 아버지가 듣고 계시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합니다.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한테는 진지한 의미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연주하면 그게 나비 효과처럼 어딘가에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있어요.

 

구독자가 50만~60만 되는, 버스킹 전문 유튜버가 제 연주를 한 번 온라인에 올려주셨는데, 조회 수는 100회 정도 나왔어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댓글에 이런 게 달렸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고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는데, 선생님의 연주를 듣고 용기를 얻어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마 베토벤 소나타 27번을 치던 영상이었을 겁니다.

 

‘내 연주를 듣고 누군가가 삶의 용기를 얻었다니, 이게 말이 되나’ 싶으면서도 정말 큰 격려가 됐어요. 저장해서 이따금 보는 그 글이 제가 피아노 앞에 앉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거리 피아노 연주의 즐거움이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세상에 어떤 쓰임이 있다고 하는 느낌. 누군가 제 연주를 듣고 삶의 용기를 얻었다는 댓글 한 줄이 그것을 확인해줬습니다.

 

둘째, 몰입과 알아차림이 동시에 있는 상태. 피아노에 완전히 몰입하면서도, 곡의 전개를 계속 신경 쓰는 것은 깨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저한테 상당한 생활의 활력소가 됩니다.

 

셋째, 돈이 안 듭니다. 그러니까 이건 상당히 좋은 취미 생활인 셈이에요. 이야기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길거리 피아노의 역사는 19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8월 미국 뉴욕에서 포드 차량에 업라이트 피아노를 싣고 군중 앞에서 연주했다는 이색 뉴스가 신문에 실렸다. 1999년에는 영국 요크에서 최초의 상설 피아노 버스킹이 시작됐다.

 

공항·철도역 등 공공장소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연주하는 피아노 문화가 본격 확산된 것은 2008년 영국 버밍엄에서 시작된 '플레이 미, 아임 유어스' 프로젝트 이후다. 3주간 도시 전역에 15대를 배치한 결과 약 14만 명이 참여했고, 이후 도쿄·바르셀로나·몬트리올 등 70개 도시에 2000대 이상이 설치됐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1970·80년대 피아노 교육 열풍 속에 성장한 피아노 경험자들이 공공 피아노를 만나 다시 건반을 누르고 있다. 서울에서는 오세훈 시장 아이디어로 세종문화회관에 공공 피아노가 설치됐고, 서울문화재단도 2023년 10월 시작한‘피아노 서울’ 사업으로 현재 서울 4개 권역 14곳에서 공공 피아노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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