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고를 둘러싼 분쟁이 해마다 늘고 있다. 환자와 유족은 진실을 알고 싶어 하고, 의료진은 방어적 진료에 내몰리고 있다. 양측 모두 상처받는 가운데 우리는 오랫동안 같은 질문을 반복해 왔다. ‘누구의 잘못인가’, 그리고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 질문 자체가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거나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낳는 것은 아닐까.
고의적인 사건이 아니라면 잘못은 과실이 있음을 뜻한다. 의료사고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 ‘과실’을 판단하는 것이다. 법적으로 과실은 ‘주의의무 위반’을 전제로 한다. 의료진이 마땅히 기울였어야 할 주의를 다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환자에게 손해가 발생했음을 입증해야 비로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의료행위는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동일한 처치를 하더라도 환자의 체질, 기저질환, 그날의 상태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의학 교과서가 권하는 표준 진료를 그대로 따랐어도 합병증은 발생할 수 있고, 최선을 다한 처치가 예상 밖의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느 지점에서 의료진의 판단이 합리적이었고, 어느 지점에서 주의의무를 벗어났는지 가려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런 구조적 어려움 탓에 과실 판단을 핵심으로 삼는 분쟁 해결 절차는 장기화할 수밖에 없다. 법원 통계로 보면 민사 1심만 2년 정도 걸리는데, 실제 체감은 그 이상인 소송도 많다. 그 사이 환자와 가족은 경제적 부담과 정신적 고통을 떠안고, 의료진 역시 진료 위축과 평판 훼손 속에서 소진된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양측의 골은 깊어지고, 진실 규명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점차 감정싸움으로 변질된다. 당사자가 아닌 일반 의료진에게도 의료사고에 대한 판단 결과가 자신의 진로 설정이나 진료영역 결정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무과실 의료 배상제도’는 이런 악순환을 끊는 대안이다. 과실 여부를 따지기 전 의료행위 과정에서 발생한 불가피한 피해에 사회가 먼저 신속하게 보상하는 구조다. 스웨덴이나 뉴질랜드, 덴마크 등은 이미 수십년간 이 제도를 운영하며 분쟁을 줄이고 환자권리를 두텁게 보호해 왔다. 책임의 소재를 가리는 데 모든 자원을 쏟는 대신, 피해 회복과 재발 방지에 집중한 덕분이다. 사고 원인을 투명하게 분석해 의료 시스템 전반의 안전성을 끌어올리는 선순환도 만들어진다. 또한 이는 의료진의 방어 진료를 완화시켜 결국 환자에게도 이익으로 돌아온다.
△재원 마련 △보상범위 설정 △제도 남용 방지라는 과제도 있다. 특히 의료계에서는 무과실 배상제도 도입으로 분쟁이 잦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이러한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나라를 보면 의료사고 발생 시 해당 의료진이 할 일은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경위서를 쓰는 것이 전부다. 이후 보상 등에 관한 업무는 전문기관이 처리한다. 이렇게 의료진의 업무가 경감된다면 사건 수 자체가 증가하더라도 지금의 분쟁 해결 구조에 비해서는 부담이 덜할 것이다.
환자와 의료진이 적대적으로 마주 서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 치유와 신뢰 회복에 쓰는 사회로 나가야 한다. 분쟁의 자리에 회복을, 책임 추궁의 자리에 안전 개선을 놓는 전환이다. 무과실 의료 배상제도는 단순한 보상 제도가 아니라 의료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다시 짜는 일이다.
김경수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kyungsoo.kim@barunla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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