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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칠 틈 없이 펼쳐진 한 편의 예술영화, 몬테카를로 ‘백조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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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선임기자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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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바람둥이다. 왕비는 흑조의 목을 조른다. 연적의 딸이자 왕실을 속인 자에 대한 복수다. 차이콥스키 음악 위에서 이처럼 탄식 나오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백조의 호수’가 아니다.

 

발레를 사랑했던 할리우드 스타이자 모나코 공비 그레이스 켈리를 기리는 발레단. 모나코 몬테카를로 발레단이 2005년 첫 내한 이후 다섯 번째 내한 공연에 프랑스어로 ‘호수’를 뜻하는 ‘라크(LAC)’를 들고 왔다. 예술감독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가 2011년 모나코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제목처럼 이 작품은 백조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호수는 왕실의 부정과 인간 내면의 선악을 비추는 거울이자 모든 것을 삼키는 심연이다.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라보라 예술기획·영앤잎섬 제공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라보라 예술기획·영앤잎섬 제공

1993년부터 몬테카를로 발레단을 이끌며 45편 이상을 만들어온 마이요의 철학은 ‘서사 발레(narrative ballet)’다. 마이요는 “나는 발레에서 서사에 관심이 있고 무용수의 연기에 관심이 있다”며 “내가 만드는 모든 스텝을 텍스트와 연결시킨다. 무용수들이 춤출 때 스스로에게 텍스트를 들려주기를 원한다”고 강조한다.

 

‘라크’는 이런 철학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차이콥스키 원작의 골격은 유지하되 인물 관계와 동기를 전면 재구성했다. 악역은 로트바르트 대신 ‘밤의 여왕’이다. 백조와 흑조는 두 명의 무용수가 따로 맡는다. 

 

1막은 흑백 무성영화로 시작한다. 어린 왕자가 부모와 소풍에서 만나 반한 흰 옷의 작은 소녀를 밤의 여왕에게 빼앗기는 장면이다. 영상이 끝나면 흰 수직 패널이 줄지어 선 추상적 궁정이 열린다. 높이가 다른 왕좌 셋. 왕과 왕비, 그리고 왕자를 위한 자리다.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화성문화재단 제공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화성문화재단 제공

파스텔톤 의상의 궁중 파티 참석자들이 춤을 추고 왕자는 신부를 간택해야 한다. 빨강·노랑·초록·주황의 단색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제각각의 개성으로 무대를 채운다. 허영심 가득한 여자, 권력에 무관심한 척하는 여자, 방탕한 여자들이 서로 다른 춤으로 왕자를 유혹하나 왕자는 관심이 없다.

 

행복해 보이던 왕실은 밤의 여왕 무리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등장하는 순간 위태로운 공간으로 바뀐다. 긴장의 절정은 왕과 밤의 여왕, 왕자와 흑조의 이중 파드되다. 왕을 유혹하는 밤의 여왕과 왕자를 뒤흔드는 흑조의 춤은 노골적인 유혹의 몸짓이다. 밤의 여왕이 내뿜는 카리스마는 왕과 왕자를 조종한다. 마치 그림자 춤처럼 두 커플이 같은 춤을 추는데 왕과 왕자는 허수아비와 같다. 이를 지켜보는 왕비의 불안은 최고조에 달한다. 남편과 아들을 유혹으로부터 떼어놓으려 하나 힘이 부족하다.

 

행복한 궁정에서 벗어난 2막에서 ‘라크’는 실체를 드러낸다. 검은 암벽들이 솟아오른 호숫가에 백조들이 등장한다. 고전 발레의 상징인 튀튀를 벗어던진 야성의 존재들이다. 흰 깃털 소재를 해체해 만든 짧은 의상에 흰 깃털 머리띠를 두른 채 무대를 가로질러 질주한다. 빠른 횡방향 이동, 앞으로 구부린 몸통, 팔꿈치를 날카롭게 꺾어 올리는 동작은 우아함 대신 하악질과 거친 뒷발질로 공격성을 분출한다.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라보라 예술기획·영앤잎섬 제공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라보라 예술기획·영앤잎섬 제공

밤의 여왕이 거느리는 대천사와 격렬하게 충돌하는 군무는 전투에 가깝다. 두 어둠의 대천사에게 수평으로 들어 올려진 채 무력하게 공중을 가르는 백조의 몸은 발레의 리프트가 아니라 납치다.

 

마이요는 백조의 손과 팔에 깃털 장갑을 끼운다. 발레에서 말을 하는 것은 팔이다. 손끝까지 흰 깃털 술로 뒤덮인 장갑은 저주로 백조가 된 소녀가 자신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신세임을 알리는 효과적인 장치다. 흑백 영상에 등장했던 추억의 첫사랑 소녀가 자신임을 왕자에게 알리려 애쓰나 왕자에겐 닿지 않는다. 저녁이 되면 흰 백조는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며 장갑을 벗는다. 비로소 첫사랑을 알아본 왕자와 백조의 이인무는 고전 발레의 파드되에 현대적 몸짓을 결합했다. 토슈즈와 발레의 선을 유지하면서도 손·팔·몸통의 비정형적 움직임, 비대칭적 힘의 충돌이 함께 어우러진다. 사랑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천진무구한 연인의 모습이 고전 발레 동작과 조합되면서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밤이 끝나가며 소녀는 다시 백조로 돌아간다.

 

16일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에선 1991년부터 볼쇼이 극장에서 지휘자로 활약 중인 이고르 드로노프가 코리아쿱오케스트라를 이끌었는데 2막 파드되 바이올린 솔로 등에서 아쉬움을 남긴 연주였다.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라보라 예술기획·영앤잎섬 제공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라보라 예술기획·영앤잎섬 제공

마이요의 ‘라크’ 3막은 다시 궁정에서 시작된다. 화려한 군무가 이어지며 모두의 시선 속에 백조로 분한 흑조가 짝짓기를 위한 춤을 춘다. 왕자는 흑조에게 사랑을 바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검은 깃털이 돋아나고 바닥을 발끝으로 치는 본성이 드러난다. 뒤늦게 나타난 백조는 실망해 무도회장을 떠나고 왕자는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는다.

 

파국의 끝은 왕비의 복수다. 왕과 치정 관계였던 밤의 여왕의 딸이자 왕실을 속인 흑조를 왕비가 교살한다. 이같은 극적 전개는 장갑으로 마법의 변화를 표현하고 발끝 버릇으로 흑조의 본성을 드러내는 디테일 등과 함께 강력한 몰입감을 만들어낸다.

 

특히 서사에 진심인 마이요는 작품 내내 객석 박수의 틈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차이콥스키 원곡을 마이요 동생 베르트랑이 속도감있게 편집했을 정도다. 관객은 박수 칠 시간 없이 빠르게 펼쳐지는 스토리를 따라가야 한다.

 

대단원은 다시 호숫가에서 벌어진다. 호숫가로 백조를 찾아온 왕자와 친구들은 밤의 여왕 무리에 맞서 백조를 되찾으려 한다. 전투 같은 군무의 대결 끝에 찾아오는 건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니다. 깊은 호수 중심에 인물·감정 모두가 함께 사라진다. 왕실의 부정, 사랑과 복수, 욕망 등 모든 게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하다. 마치 한 편의 예술영화를 본 것 같은 작품이다. 동시대성이 부여된 발레가 이런 것이라는 걸 보여준 무대였다. 화성·서울에 이어 20일 대전예술의전당에서 마지막 공연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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