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 길게 뻗은 다섯 줄기의 대나무. 그 뒤편으로 마치 숲의 정령처럼 여성 무용수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작품은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하늘과 땅을 잇는 죽(竹)의 곧음과 힘에 반응하는 탄력. 그리고 그들 사이로 지나는 바람소리. 대나무만이 갖는 특성이 몸의 언어로 번역되며 무대를 가득 채운다. 기괴하다 싶을 정도의 극단적 자세에 리듬과 탄력이 더해지면서 강렬한 역동성을 만들어내고 에너지를 분출한다. ‘강효형’표 안무의 힘이 농밀하게 응집되는 대목이다.
서울시발레단이 신작 ‘인 더 밤부 포레스트’를 15∼1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처음 선보인다. 2024년 창단한 서울시발레단이 만들어낸 두 번째 전막 창작 레퍼토리다. 서울시발레단은 그간 국내외 안무가 지도 아래 여러 작품을 부지런히 소화하며 역량을 쌓아왔다. 이번 무대는 그 축적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창작단체로서 가늠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14일 언론 공개 리허설로 미리 본 신작은 혼돈에 빠진 한 남자가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바람과 마주하며 평안을 찾아가는 여정을 프롤로그와 여섯 춤판으로 펼쳐낸다. 혼돈과 숲 속 바람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프롤로그와 1장까지는 이후 무대를 위한 예열로 느껴진다.
2장 ‘죽(竹). 유연하면서도 굳건한’부터 작품은 개성을 뚜렷하게 드러내며 무대 위를 질주한다. 무용수들이 동작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가는 독특한 방식이 인상적이다. 마치 지조와 원칙의 상징인 대나무의 마디(節)를 보는 듯하다. 대나무는 마디를 만들어 숨을 고르며 위로 뻗는다. 무용수들이 잠시 멈추는 그 찰나가 바로 그 마디를 보는 듯하다.
강풍에 완전히 휘면서도 꺾이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대나무처럼 단단하되 유연하고 굽히되 부러지지 않는 속성이 몸으로 구현된다. 동작이 가속되는 순간은 ‘우후죽순(雨後竹筍)’이다. 하루에도 수십 센티미터를 솟구치는 대나무의 폭발적 생명력이 무대 위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다섯 대나무 정령의 춤은 자연스레 3장 ‘비움’의 여성 군무로 이어진다. 같으면서도 저마다 결이 다른 대나무를 연상시키는 의상이 빚어내는 시각적 아름다움이 춤과 어우러진다. 마지막 순간 무용수들이 깊이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면 관객도 이들과 함께 호흡하며 무대와 객석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숨을 고른 뒤 4장에서는 남성군무가 대나무를 품은 지세(地勢)을 연상시키는 원초적인 춤으로 무대를 다시 가속한다. 5장 남녀 파드되를 거쳐 6장 피날레에 이르면 저마다의 깊이와 높이와 마디와 숨을 가진 것들이 마침내 하나의 숲을 이룬다.
쉼 없이 펼쳐지는 한 시간 남짓 이 전막 발레극이 남긴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서사의 일관성을 위해 혼돈 속 남자 한 명이 무대를 관통하는 구성이 때로 흐름에 걸림돌이 되거나 극적 긴장을 분산시킨다.
이번 초연은 반주 녹음에 의존했는데 재연은 달라지기를 기대한다. 거문고를 중심으로 한 국악기에 기타와 베이스, 피아노를 결합한 박다울의 음악은 대나무의 질감과 울림을 입체적으로 구현하며 안무와 긴밀하게 호흡한다. 다음 무대에선 실황 연주와 함께 대나무 숲의 움직임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난다.
서울시발레단이 거둔 또 다른 성과는 안성수·차진엽·허용순·주재만·이루다·유회웅으로 이어진 자신들의 한국 안무가 계보에 강효형을 새로 추가한 것이다. 국립발레단원 출신인 강효형은 KNB 무브먼트 시리즈를 통해 발굴된 안무가다. ‘요동치다’로 안무가 첫발을 내디딘 이후 ‘허난설헌-수월경화’. ‘호이 랑’ 등 전막 발레를 창작했다. 이번 작품은 국립발레단을 벗어난 그의 첫 전막작품이다.
정옥희 무용평론가는 “좋은 안무가를 키우는 것은 좋은 무용수를 키우는 것보다 힘들다”며 “시장이 여전히 고전발레, 스토리발레를 선호함에도 불구하고 좋은 레퍼토리를 직접 만들려는 시도는 발레계의 기초체력을 강화한다. 이런 맥락에서 서울시발레단은 창작발레의 질적 도약을 견인하는 중요한 플랫폼으로 기능한다”고 평가했다. 서울시발레단이 새로운 안무가와 함께 그간 쌓아온 역량을 온전히 꽃피워낸 무대였다.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1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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