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박현모의 한국인 탈무드] 왕건, 어떻게 후삼국의 승자가 되었나

관련이슈 박현모의 한국인 탈무드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인쇄 메일 url 공유 - +

싸움의 핵심은 이기는 판을 먼저 만드는 것
비전 앞세워 적재적소 인재 등용으로 결실

고려 태조 왕건에게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시기는 언제였을까? 어떤 이는 궁예의 ‘미륵관심법’ 시험으로 죽을 뻔했던 915년, 서른아홉 살의 위기를 꼽을 것이다. 또 어떤 이는 927년, 후백제의 견훤과 맞서 싸우다 전군이 패퇴하고 “겨우 목숨을 건진” 쉰한 살의 때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왕건의 생애 전체를 돌아보면, 어느 한때만 특별히 어려웠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라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하고, 통일 이후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일까지 그의 생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 해결의 연속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왕건의 리더십이 가장 빛나는 시기를 꼽으라면, 후삼국 통일을 이끌던 918년부터 935년까지의 18년이라 할 수 있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이 시기는 비유하자면 링컨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부상하던 1859년 무렵과 비슷하다. 경쟁자였던 수어드나 체이스가 자신감과 조급함 속에서 지지자를 잃어갈 때, 링컨은 ‘두 번째 자리’를 목표로 삼고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되 야망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고,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마음을 절제하며 다른 후보들에 대해서도 공정하게 말했다. ‘권력의 조건’의 저자 굿윈은 “대통령이 되기 전, 바로 이 시기만큼 정치가로서 그의 완숙한 면모를 잘 보여주는 때는 없었다”고 평가한다. 곧, 자신의 입장은 분명히 하되 언어는 신중하고 정확하게 사용한 것이 그의 가장 큰 승리 요인이었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후삼국 통일기 초반인 918년부터 920년까지 드러난 왕건의 언행이 더 주목된다. 첫째, 즉위 직후인 918년 9월, 그는 평양을 대도호로 삼아 고구려의 정통 계승을 분명히 했다. 이는 ‘고려’라는 국호 사용과 함께 서경 중시, 북진 정책, 발해 유민 포용으로 이어졌다. 아직 약했던 고려를 신라와 후백제와 대등한 한 축으로 세우려는 선언이었다. 이어 919년에는 3성 6상서관을 설치해 골품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인재를 쓰는 관료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국가 정체성과 제도적 기반을 동시에 세운 것이다. 이는 즉위 초 잇따른 역모, 곧 환선길·이흔암 등의 반란 속에서도 왕위를 안정적으로 지켜내는 기반이 되었다.

둘째, 왕건은 920년쯤 진철대사 이엄을 찾아가, 전쟁을 피할 수 없는 현실과 백성의 생명을 아끼고 싶은 마음 사이의 갈등을 털어놓았다. 이엄은 “필부와 제왕은 처지가 다르다”며 그를 위로하고 전투의 정당성을 뒷받침했다. 이 대화가 의미 있는 것은, 40대 초반의 왕건이 당대의 정신적 지도자인 고승들에게 자신의 내적 갈등을 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엄을 비롯한 고승들의 지지를 얻어 불교계를 정치적 기반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셋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으려는 노력이었다. 왕건은 즉위 직후 내린 첫 조서에서 궁예의 몰락 원인을 민심의 상실에서 찾았다. 이어 “세상을 이롭게 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할 어진 인재를 가려 뽑는 것이 우선”이라 하며,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을 약속했다. 실제로 그는 최초의 31명 인사에서 개국공신보다 정무 능력을 갖춘 인물을 먼저 기용했다. 개국공신들에는 관직 대신 금은과 포백 같은 물품으로 포상했다. 한마디로 왕건은 민심을 얻는 가장 확실한 길이 공정한 인재 등용과 민원(民怨)의 방지에 있음을 알고 이를 실천한 것이다.

왕건은 견훤과의 싸움도 서두르지 않았다. “견훤이 스스로 악행을 거듭한 끝에 자멸하기를 기다릴 뿐”이라며 때를 기다렸다. 그런 그에게 맨 먼저 발해 유민들이 귀의했고, 이어 신라의 왕과 귀족들까지 고려에 의탁해 왔다. 마침내 최강의 경쟁자였던 견훤마저 아들들의 반란으로 쫓겨나 왕건에게 투항했다(935년).

싸움의 핵심은 먼저 칼을 빼는 데 있지 않았다. 이길 수 있는 판을 먼저 만드는 데 있었다. 후삼국의 세 지도자 가운데 가장 약한 위치에서 출발했던 왕건이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고, 때를 기다릴 줄 알았으며, 적재적소의 인재 등용을 통해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왕건은 칼의 힘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어 “삼한을 통일한” 진정한 리더였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오피니언

포토

[포토] 언차일드 이본 '냉미녀'
  • [포토] 언차일드 이본 '냉미녀'
  • 김고은, 싱그러운 미소
  • 정수정 '완벽한 미모'
  • 하츠투하츠 이안 '눈부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