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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를 꿈꿨던 총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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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선임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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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빵야', 한국 현대사의 증언

한때 반짝했던, 그러나 지금은 후배에 치이는 신세인 드라마 작가 나나는 소품창고에서 낡은 장총을 발견한다. 1945년 인천 조병창에서 일본 관동군용으로 태어난 아리사카 99식 소총 ‘총번 나나 나나 제로 니 제로(77020)’다. 재기할 신작 아이디어를 찾던 작가의 상상 속에서 장총은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은 존재로 깨어난다. 입신양명을 꿈꾸는 관동군 조선인 장교 기무라부터 소녀 빨치산 설화까지... 죽고 죽이며 장총의 주인은 아홉 번 뒤바뀐다. 그 사연을 드라마로 만들어보려는 나나의 안간힘은 또 다른 스토리다.

 

극작가 김은성 작, 연출가 김태형의 연극 ‘빵야’가 세 번째 무대를 열었다. 파란만장한 비극의 연속이었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장총의 기억과 이를 드라마로 만드는 이들의 고군분투를 보여주는 이중 구조의 서사극이다. 2022년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선정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후 여러 상을 받았다.

 

악기가 되고 싶었던 장총 한 자루와 그 꿈을 이야기로 써주려 했던 작가의 만남을 그린 ‘빵야’.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 총소리 너머로,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의 의미를 묻는 창작 연극이다.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악기가 되고 싶었던 장총 한 자루와 그 꿈을 이야기로 써주려 했던 작가의 만남을 그린 ‘빵야’.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 총소리 너머로,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의 의미를 묻는 창작 연극이다.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빵야’의 도발적인 발상은 99식 아리사카 소총에 인격을 부여한 것이다. 백두산 압록강변 졸참나무로 만들어진 몸통에 마당 펌프, 부엌 가마솥 등이 일제 공출물로 녹아 만들어진 총열이 합쳐진 장총.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서 모두 모두 총이 됐어”라며 그 자체가 비극의 연속인 생애를 털어놓는다.

 

정교한 이중 액자식 구성은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바깥 이야기(현재)는 5년째 새 작품을 쓰지 못하는 한물간 작가의 분투기다. 소품창고에서 장총을 발견하고, 이를 소재로 대형 역사 드라마를 집필하려 한다. 시놉시스 작성→제작자 미팅→편성 회의→계약 협상→대본 수정 요구와 거절에 이르기까지 드라마 제작 산업의 현실이 날것 그대로 펼쳐진다.

 

안쪽 이야기(과거)는 장총이 겪어온 주인 아홉 명의 에피소드다. 기무라부터 조선인 병사 길남, 팔로군 전사 선녀, 경비대 이등병 무근, 서북청년단원 신출, 학도병 원교, 의용대원 아미, 토벌대원 동식, 소녀 빨치산 설화가 나나 집필 과정에 따라 하나씩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나나가 장면 번호를 부르면 속도감 있게 일제 치하 만주에서 벌어진 관동군 대 독립군·팔로군의 투쟁과 광복 후 혼돈, 전쟁, 군부 독재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가 입체감 있게 전개된다. 익히 존재하는 실제 사례처럼 친일파 척결에 실패한 광복 전후사가 울분을 자아낸다.

 

연극 ‘빵야’의 한 장면.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연극 ‘빵야’의 한 장면.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후반부에선 원래 역사를 좋아했다는 작가 김은성의 고민이 관객에게 크게 다가온다. 특히 나나가 관객을 향해 직접 토로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역사를 이야기로 쓸 자격에 대한 두려움. 나한테 기무라를 욕할 자격이 있을까? 나는 기억하고 기록하고 증언하기 위해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일까?” 다양한 형식으로 역사극을 만들고 소비하는 세상에 던지는 묵직한 질문이다.

 

편성 회의 장면에서 방송사 기획팀이 대본에 가하는 수정 요구들은 웃기면서도 씁쓸하다. 기무라를 일본인으로 바꾸라, 팔로군을 광복군으로 바꾸라, 살구를 개가 아니라 여자로 만들라. 상업 논리가 역사적 진실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희극적으로 보여준다.

 

나나를 통해 극을 쓴다는 것의 어려움과 고민을 털어놓은 김은성 대본은 치밀하고, 대사는 문학적 밀도가 높으면서도 극적 효과를 잃지 않는다. 작가가 글을 쓰는가, 글이 작가를 부려서 세상에 나오는가. 어느 순간 나나는 장총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야만 하는 소명을 수행한다. “이야기 하나를 힘들게 쓰면 힘든 사람 하나가 잠시 쉬게 될지도 몰라. 이야기 하나를 아프게 쓰면 아픈 사람 하나가 조금은 나아질지도 몰라.” 빵야가 나나에게 건네는 이 말은, 쓰는 행위가 곧 위로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동시에 나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증언하는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 있는 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스스로와 타협을 봅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거짓말에 가깝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정직함이 역사를 이야기로 만드는 행위의 책임을 묻는다.

 

사회적 메시지가 선명한 작품이지만, 서정적 장면은 가슴을 파고든다. 배경이 북만주이기에 가능한 설정이었을 고구려 돌무덤에서 죽어가는 병사가 그 속에서 별자리 벽화를 바라보는 장면이 선명한 심상을 만들어낸다. 장총의 마지막 주인 설화가 처한 운명을 그려내는 연출도 감성적이다. 설화가 일제 강점기 때 유행했던 노래 ‘오빠는 풍각쟁이’를 부르며 죽은 이를 위로하는 대목은 관객의 콧등을 시큰하게 만든다. 토벌대 군악대의 연주를 듣는 빵야가 “악기들은 통곡하고 있었어”라고 외치는 장면은 음악마저 전쟁의 도구가 되는 상황에 대한 처절한 비판으로 다가온다.

 

나나와 장총의 대화 사이로 역사적 에피소드가 끼어들고, 에피소드 안에서 다시 나나의 내레이션이 개입하는 교차 구조는 17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핵심 장치다. 이번 시즌 나나로 무대에 선 정새별 연기가 가슴을 두드린다. 탁월한 발성이 연기의 가장 기본이면서 결정적인 도구임을 보여준다. 극을 이끌어가는 주연으로서 때로는 대사를 속사포처럼 쏟아내야 하는 장면들이 상대 배우들과의 호흡 속에서 빈틈없이 이뤄진다. 이 산 저 산을 날아다니는 소녀 빨치산 설화를 연기한 박수야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오빠는 풍각쟁이’를 부르며 눈물로 젖은 눈이 반짝인다.

 

역사란 무엇인가, 기억이란 무엇인가,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기는 악기가 될 수 있는가. 여러 겹의 질문을 품은 ‘빵야’. 주인공이 계속 바뀌는 옴니버스 구조, 스타 캐스팅의 부재, 문학적인 대사 등 드라마 산업이 약점이라고 거부한 요소들이 연극에선 참신하게 빛난다. 편성에 실패한 드라마가 연극이 되어 살아남았듯, 총이 되어버린 나무와 쇠붙이가 악기를 꿈꾸는 이 이야기는 불가능한 꿈의 가치를 증명한다.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5월 2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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