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이 아닌 동성 간에도 남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국익을 위해 그 정도 수치쯤은 얼마든 감당이 가능하다고 여긴 지도자도 있었다. 윈스턴 처칠(1874∼1965) 전 영국 총리가 주인공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12월 미국을 방문한 처칠은 백악관의 빈 방에 묵었다. 하루는 목욕을 마치고 벌거벗은 상태로 있던 처칠의 숙소에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대통령이 불쑥 들어갔다가 그만 그 알몸을 목격하고 말았다. 루스벨트가 “실례했다”며 다급히 밖으로 나가려 하자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대영제국 총리는 미합중국 대통령께 아무 것도 숨기는 게 없습니다.” 2차대전 수행을 위해 미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처칠의 눈물겨운 구애였다.
전쟁 기간 처칠과 루스벨트가 쌓은 깊은 우정은 미·영의 이른바 ‘특수 관계’(Special Relationship)로 발전했다. 처칠은 2차대전 후에도 영국이 대서양 건너 미국과 계속 강력한 동맹을 맺고 국제 안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미국 입장에서도 영국은 신뢰할 만한 든든한 파트너였다. 영국 패권 시대를 뜻하는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를 끝내고 새롭게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연 미국으로선 과거 수많은 식민지와 자치령으로 구성된 제국을 경영한 경험이 있는 영국한테 배울 점이 아주 많았다.
2003년 미국은 국제사회, 심지어 동맹국들 사이에서도 고립된 처지였다. 2001년 9·11 참사 직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은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2006년 사망) 정권을 혐오했다.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WMD)를 만들어 비축하고 있다’는 명분을 앞세워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했다. 프랑스, 독일 등은 이라크 내 WMD의 존재에 회의적이었다. 아마 영국도 내심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을 묶고 있는 특수 관계의 대의를 저버리기 어려웠다. 결국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는 연인원 약 4만5000명의 병력을 보내 미국과 함께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라크 전쟁이 끝난 뒤 조사해보니 WMD는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블레어는 ‘부시의 푸들’이란 비웃음을 샀다.
요즘 미국의 이란 공격을 대하는 영국의 태도를 보면 예전과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지난 2월28일 첫 공습 단행 직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에게 전화를 했다. 인도양의 옛 영국령 차고스 제도(諸島) 디에고가르시아 그리고 잉글랜드 페어퍼드 두 곳의 공군 기지를 미군이 사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스타머는 이를 거절했다. 하루 지나 입장을 번복하긴 했으나 트럼프는 극심한 실망감과 배신감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스타머를 향해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처칠이 아니다”라는 독설까지 내뱉었다. 하지만 스타머는 5일 기자회견에서 트럼프를 향해 “이란 핵 문제를 전쟁이 아닌 협상으로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이젠 미·영 특수 관계도 옛말이 된 것일까. 우리가 알던 예전의 그 영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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