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대통령의 소련 국빈 방문도 성사
노태우정부 시절 공산권 국가들을 상대로 한 북방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초대 주(駐)소련 대사를 역임한 공로명 전 외무부(현 외교부) 장관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고인은 분단 이전인 1932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나 월남했다. 명문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58년부터 외무부에서 일했다. 외교관으로서 주미 대사관, 주일 대사관 등에서 근무하고 외무부 본부의 동북아과장, 아주(亞洲)국장, 정무차관보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가 외무부 차관보이던 1981년 한·일 관계는 냉랭했다. 갓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에 100억달러 제공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전 대통령은 “한국이 공산 세력으로부터 일본을 방어하는 방파제 역할을 하니 경제 발전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라는 논리를 들었다. 하지만 일본은 강하게 반발하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정부는 공 차관보를 단장으로 하고 경제기획원(현 기획예산처) 과장 등이 참여하는 대표단을 꾸렸다. 일본에 간 대표단이 협상을 하는데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일본어 통역을 맡은 우리 외무부 과장이 기획원 과장의 설명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실수를 연발한 것이다. 보다 못한 공 차관보가 직접 통역을 맡아 그럭저럭 회의를 끝냈다.
이는 지금도 외교가에선 “대표단장이 대표단 단원의 통역을 직접 한 보기 드문 사례”로 회자된다. 고인의 투철한 사명감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한·일 협상은 1983년 일본이 한국에 경제협력 명목의 자금 40억달러를 지원하기로 하며 타결됐다.
그 뒤 고인이 주브라질 대사를 거쳐 주뉴욕 총영사로 있던 1989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 외교를 본격화하고 나섰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현 러시아)과의 수교에 사활을 건 노 대통령은 고인을 미국에서 불러들여 주모스크바 영사처장이란 직책을 맡겼다. 일단은 영사 신분으로 소련에 부임한 뒤 한·소 수교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취지였다. 1990년 2월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공 영사처장이 노 대통령에게 “출정(出征)하는 각오로 임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낯설고 추운 모스크바에서 고인은 영사처 직원들을 다독여가며 소련과의 협상에 매진했다. 마침내 1990년 9월 한·소 양국이 외교 관계 수립에 합의하며 공 영사처장은 초대 주소 대사로 임명됐다. 그 직후 한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의 소련 국빈 방문까지 성사시켰으니 대단한 외교력이 아닐 수 없다.
1994년 12월 주일 대사로 재직하던 고인은 당시 김영삼(YS) 대통령에 의해 외무장관으로 발탁했다. 1958년 외무부에 들어간 지 36년 만에 이룬 값진 성취였다. YS 청와대와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2년가량 장관으로 일했으나, 한국과 국제사회에 그가 남긴 존재감은 뚜렷하다는 평가다. 외무부 후배인 이용준(70)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2021년 출간된 책 ‘공로명과 나’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이 외교부에 38년간 몸담으며 장관 21명을 모신 사실을 소개한 뒤 “공 장관에 필적할 만한 장관은 보지 못했다”고 단언했다.
2024년 7월 외교부 산하 국립외교원에 ‘공로명 세미나실’이 문을 열었다. 전직 외교장관 이름을 딴 첫 사례다. 고인이 1992∼1993년 국립외교원의 전신인 외교안보연구원 원장을 지낸 점을 기리는 차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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