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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기자의 전설, 피터 아넷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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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2-21 16:54:58 수정 : 2025-12-21 16:54:57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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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뉴질랜드 남섬에서 태어난 청년이 있다. 당시만 해도 뉴질랜드에는 징병제가 존재했다. 군대에 가는 것이 너무나 싫었던 이 청년은 조국을 등지고 동남아시아로 떠났다. 그는 태국 방콕에 머물며 한동안 AP 통신의 계약직 기자로 일했다. 1960년 그때만 해도 친미 정권이 집권하고 있던 라오스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AP는 이 20대 중반 계약직 기자 덕분에 세계적인 특종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젊은이는 베트남 사이공(현 호치민)에 있던 AP 통신 베트남 지국에 정식 기자로 채용이 됐다. 그의 이름은 피터 아넷(1934∼2025)이다.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직후 미 NBC 방송사 소속 종군기자 피터 아넷(1934∼2025)이 바그다드 현지에서 리포트를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1960년대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에선 자유주의 남베트남(월남)과 공산주의 북베트남(월맹) 간에 전쟁이 한창이었다. 미국과 한국 등 서방 국가들은 월남을, 소련(현 러시아)과 중국 등 공산 국가들은 월맹을 각각 지원했다. 아넷은 미국 측 종군기자로 일했으나 그의 기사는 미군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아넷은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전달함과 동시에 미군의 무리한 작전을 고발하는 보도로 1966년도 퓰리처상을 받았다. 하지만 미 행정부, 특히 군 지휘부는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베트남에서 종군기자로 경력을 쌓은 아넷은 1991년 걸프 전쟁 당시 진가를 발휘했다. 당시 CNN 소속이던 그는 서방 TV 기자로는 유일하게 이라크 바그다드에 남아 한 달 이상 계속된 미군의 공습과 그로 인해 불타는 바그다드 시내 모습 등 피해 상황을 가감없이 전달했다. 1997년에는 이슬람 테러 조직 알카에다 창립자 오사마 빈라덴(2011년 처형)과 서방 언론 최초의 인터뷰도 했다. 미국에 ‘지하드’(성전·聖戰)를 선포한 빈라덴은  “당신의 계획은 무엇이냐”는 아넷의 질문에 “곧 언론을 통해 알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4년 뒤인 2001년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9·11 테러를 예고한 셈이다.

 

2003년 9월 한국을 찾은 ‘종군기자의 전설’ 피터 아넷이 국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발언하고 있다. 당시 그는 “기자의 가장 큰 무기는 ‘팩트’(사실)”라며 “언론과 정부는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2007년 은퇴하기까지 40년 넘게 현장 기자로 일한 아넷이 지난 17일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은 AP 통신에서 CNN으로, 다시 NBC로 옮겨 다니는 등 파란만장한 언론인의 삶을 살았다. 1979년 당시 유엔 사무총장을 따라 북한 평양을 방문하고 김일성과 만나는 등 한반도와도 깊은 인연을 쌓았다. 생전에 ‘종군기자의 전설’이란 명예로운 호칭을 얻은 고인은 2003년 방한 당시 민감한 외교·안보 분야를 취재하는 국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기자의 가장 큰 무기는 ‘팩트’(사실)입니다. 언론과 정부는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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