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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고르바초프·베이커 담판의 진실은?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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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2-20 15:53:33 수정 : 2025-12-20 15:53:32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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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독일 통일 당시 미국과 소련(현 러시아)이 막판까지 씨름한 아주 까다로운 문제가 있다. 통일된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으로 계속 남아야 하는지 여부가 그것이다. 서독은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의 군사 동맹 나토에 속했다. 반면 동독은 소련이 이끄는 공산주의 진영의 군사 동맹 바르샤바조약기구(WTO) 회원국이었다. 미국은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는 형태로 통일이 이뤄지는 것이란 점을 강조했다. 동·서독이 합쳐진 독일은 사실상 서독의 후예인 만큼 나토 잔류는 당연하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소련은 통일 독일이 동서 진영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중립국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오른쪽)과 제임스 베이커 전 미국 국무부 장관. 1990년 2월 모스크바에서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베이커가 “(동·서독 통일 이후) 나토를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자 비로소 고르바초프도 통일 독일의 나토 잔류에 동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여기서 ‘동쪽’이 무엇인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AP연합뉴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9년 미국, 캐나다와 영국·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 간의 합의 아래 나토가 창설될 당시 서독은 배제됐다. 2차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인데다 전후 무장 해제로 군대가 없는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 한반도에서 터진 6·25 전쟁이 서독의 운명을 바꿨다. 점점 격화하는 동서 냉전 속에서 미국·영국·프랑스 등은 앞으로 있을 지 모를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결국 서독은 재무장을 거쳐 1955년 나토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그러자 소련은 기다렸다는 듯 동독의 재무장, 그리고 WTO 창설로 맞대응했다. 냉전 기간 유럽인들은 만약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나토와 WTO가 팽팽히 대치하는 동·서독 경계선이 그 최전선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듬해 동·서독 통일 협상이 본격화할 당시 소련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한때 미국과 세계 패권을 다툴 만큼 강했던 국력은 어느새 소진되고 하루하루 국민 생계가 위협을 받는 지경이었다. 소련의 ‘개혁’과 ‘개방’을 기치로 내걸고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은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의 요구를 거절할 힘이 소련에겐 없었던 것이다. 1990년 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부 장관은 고르바초프와 만난 자리에서 “(동·서독 통일 이후) 나토를 동쪽으로 1인치(약 2.5㎝)도 확장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통 큰 양보를 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며 통일 독일의 나토 잔류를 받아들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연례 기자회견 도중 발언하고 있다. 푸틴은 나토가 1990년 당시 소련 정부에 ‘동진을 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한 약속을 깼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타스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략을 단행하며 “나토가 1990년의 ‘동진(東進) 포기’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란 이유를 들었다. 나토는 1999년 체코·폴란드·헝가리를 시작으로 냉전 시절 소련 영향권에 속했던 동유럽 국가들을 회원국으로 수용했다. 푸틴은 이를 나토의 동진으로 규정하며 “서방이 고르바초프와의 합의를 깬 것”이라고 비난해왔다. 19일 연례 기자회견에서도 같은 입장을 되풀이했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선 “나토를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는 베이커 발언 속의 ‘동쪽’은 ‘동독’을 뜻한다는 의견이 정설로 통한다. 동·서독 통일 후 나토 군대가 옛 동독 땅에 주둔하는 일은 없을 것임을 강조했을 뿐이란 것이다. 고르바초프 본인도 생전에 같은 입장을 밝혔다. 오직 푸틴만이 ‘동쪽’은 ‘동유럽’이라고 고집을 부린다. 단순한 오해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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