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다가오는 1950년 4월 경북 안동 한 양반집. 안주인 김씨 환갑을 맞아 객지에 나가 살던 세 딸 금실이, 박실이, 봉아가 돌아온다. 고모와 두 며느리 장림댁과 영주댁, 그리고 행랑어멈 독골할매와 그의 수양딸 홍다리댁도 함께하는 잔치다. 남정네들은 없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바깥주인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하다. 병약했던 큰아들은 세상을 떠났으며, 둘째 아들은 좌익으로 몰려 대구교도소에 수감된 상태다. 그래도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여인들은 커피를 어떻게 마시는가부터 고모의 옛사랑까지 끝없는 이야기로 밤을 지새운다. 지나간 사연은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무대를 채운다.
2020년 국립극단 70주년 기념작으로 만들어져 대호평 받은 연극 ‘화전가’가 25, 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오페라로 새롭게 태어났다. 우리말, 그것도 안동 사투리가 지닌 말맛과 배삼식 작가 글이 지닌 음악성과 운율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살려낸 작품이다. 음악극 ‘적로’(2016)에서 시작해 오페라 ‘1945’(2020), 음악극 ‘마디와 매듭’(2022)으로 이어진 배삼식 작가와 최우정 작곡가의 협업이 절정에 달한 무대다. 배삼식의 서정적 문장은 최우정의 선율 위에서 노래가 되고 대사가 된다.
“사월이라, 청보리밭, 봄바람이 건너가네. 보리피리 불며 가네.”
“생이여, 달콤한 생이여, 눈처럼 하얗게 흘러내리게. 옥처럼 빛나며 여기 오시게.”
연극 무대에서도 빛났던 문장들은 오페라 무대에서 한층 더 시적인 노래로 피어난다. 최우정은 서양 오페라의 골격 위에 한국 악극 전통을 더했다. “참꽃은 뽈도그레, 산수유 영춘화/행정댁네 담장에는 보오얀 살구꽃”, “빌것도 없는 인새이/와 이래 힘드노”같은 생생한 입말로 아리아를 만들어냈다. 그는 “오페라처럼 많은 노력과 시간, 자원이 들어가는 작품을 만들 때마다 ‘내가 왜 지금 여기서 이걸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며 “한국적 정서와 언어의 매력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설명대로 ‘화전가’는 전통적인 서양 오페라의 틀을 넘어서 한국어의 말맛과 리듬, 그리고 극적 언어의 음악성을 탐구한다.
막내딸 봉아의 회상으로 시작하는 1막을 지나, 신문물 ‘초꼬레뜨’와 ‘커피’, 그리고 설탕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2막부터 보는 눈과 귀가 즐겁다. 대표적 무대미술가 이태섭이 만든 아름다운 무대에선 커피접시로 부채춤을 추는 장면도 펼쳐진다. 안무가에서 출발한 정영두 연출이기에 가능한 무대다.
봉아 역의 소프라노 윤상아가 발랄한 에너지로 극을 이끌고, 극의 중심인 김씨 역의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은 한 차원 더 깊은 울림을 지닌 노래를 선보인다.
가장 인상적인 4막은 우리말 아리아의 향연이다. 옥중에 있는 남편을 기다리는 영주댁(김수정)의 ‘돌아와’를 비롯해 여인들 각자의 사연이 절절한 노래로 쌓이며 피날레로 향한다. 다만 화전놀이 합창과 김씨댁과 고모의 대화, 그리고 다시 봉아의 시낭독으로 이어지는 마무리는 다소 늘어진다. 1막 내내 무대 전면에 걸어둔 삼베 느낌의 막도 객석에는 답답함을 준다.
그럼에도 한국현대오페라로서 ‘화전가’가 보여준 가능성은 인상적이다. ‘말이 곧 음악’이 되는 순간, 한국 오페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국어로 부르는 오페라는 단순한 언어의 선택이 아니라 정체성의 회복이기도 하다. ‘화전가’가 들려준 우리말 선율은 ‘K-오페라’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이정표로 삼을만 하다. 우리말 억양이 음악이 되고 모두가 공감하는 지나간 세월이 무대로 옮겨지면서 모두가 바라마지 않던 ‘K-오페라’가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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