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남정훈 기자] 영화 ‘아저씨’의 명대사를 기억하는가. “내일을 보고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에게 죽는다”...프로야구 한화와 삼성의 2025 KBO 포스트시즌 플레이오프(PO·5전3승제) 4차전을 이 명대사가 그대로 들어맞는 한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날 선발 라인업은 삼성의 약우세였다. 삼성은 ‘푸른 피의 에이스’ 원태인을 내세웠고, 4차전 선발로 내정됐던 문동주에게 3차전 6~9회 4이닝 역투를 맡겼던 한화는 임시 선발로 정우주를 내세웠다. 아무래도 이름값만 보면 원태인의 우위였다.
그러나 경기 양상은 달랐다. 원태인이 1회부터 점수를 내주고 시작했다. 1회 1사 후 리베라토에게 안타를 맞은 뒤 문현빈에게 우중간을 가르는 적시 2루타를 맞았다. 한화 1-0 리드. 3차전까지 2승1패로 리드를 잡은 한화로선 더할 나위 없는 스타트였다.
임시 선발이었지만, 정우주는 씩씩하게 공을 던졌다. 아니 최고의 역투였다. 150km 초중반을 넘나드는 포심 패스트볼은 너무나 위력적이었다. 2회부터 3회 1사까지 네 타자 연속으로 삼진을 잡을 때 위닝샷은 하이 패스트볼. 삼성 타자들은 눈높이로 들어오는 패스트볼에 방망이를 연신 헛돌렸다. 볼인지 알면서도 방망이를 낼 수밖에 없었는지, 스트라이크로 보여서였는지는 몰라도 타선 전체가 정우주의 하이 패스트볼에 추풍낙엽으로 쓰러졌다.
4회까 1-0, 팽팽한 투수전으로 이어지던 경기는 5회에 요동쳤다. 경기 양상을 뒤흔든건 1회 선취타점의 주인공 문현빈. 이 상황을 연출한건 원태인 본인이었다. 한화가 5회 선두타자 최재훈의 안타로 무사 1루를 만들었다. 타석엔 타격감이 저조한 심우준. 한화 벤치의 선택은 당연히 희생번트였다. 심우준의 번트를 잡은 원태인은 발이 느린 최재훈을 감안해 1루가 아닌 2루로 공을 던졌지만, 타구가 워낙 높게 튀어오르기도 해서 발이 느린 최재훈조차 세이프가 됐다. 1사 2루가 아닌 무사 1,2루가 되면서 분위기는 묘하게 흘렀다.


후속 타자는 손아섭. 타격감이 썩 좋지 못한 손아섭에게 한화는 다시 한 번 번트를 지시했고, 무난하게 성공해 1사 2,3루. 그러나 리베라토의 2루 땅볼 타구가 짧게 가면서 3루 주자 최재훈은 홈으로 뛰어들지 못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2사 2,3루. 여기서 한화가 점수를 내지 못하면 오히려 한화가 분위기를 내줄 수 있는 상황. 한화 타선 내에서 타격감이 최고조였던 문현빈이 볼카운트 2B-2S에서 원태인의 시속 148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이 가운데 높게 들어온 것을 그대로 잡아당겼고, 이 타구는 우중간 담장을 살짝 넘어갔다. 4-0. 2006년 이후 19년 만의 한화의 한국시리즈 진출이 성큼 다가온 순간이었다.
다소 벌어진 리드가 한화 벤치와 김경문 감독의 마음을 놓게 만든 것일까. 한화 벤치의 불펜 운영이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 경기 전 김경문 감독은 “오늘 외국인 투수들도 불펜에서 대기한다”고 했지만, 넉점 차 리드가 넉넉하게 느껴졌을까. 6회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는 황준서였다. 이날 폰세나 와이스를 쓰지 않고 경기를 잡아내면 25일부터 잠실에서 시작되는 한국시리즈 1,2차전에 선발 투수로 폰세와 와이스를 쓸 수 있었다. 그 달콤한 유혹 때문이었을까. 폰세나 와이스가 아닌 황준서를 올렸고, 결국 사달이 났다.
2년차 신예 황준서는 올라오자마자 김지찬에게 3루타, 김성윤에게 볼넷을 내주며 무사 1,3루에 몰렸고, 구자욱에게 적시타를 맞았다. 급해진 한화 벤치는 부랴부랴 마무리 김서현을 호출했다. 1차전에서 0.1이닝 2실점으로 무너졌던 김서현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기에 일찍 올리는 선택을 했지만, 이는 ‘최악의 수’가 됐다. 무사 1,2루에서 마운드에 오른 김서현은 ‘홈런왕’ 디아즈는 땅볼로 처리했지만, 삼성 타선 중 타격감이 가장 좋았던 김영웅을 넘어서지 못했다. 0B-2S에서 던진 포심 패스트볼이 한 가운데 몰렸고, 김영웅에겐 좋은 먹잇감이 됐다. 힘껏 잡아당긴 타구는 그대로 우측 담장을 넘어가며 4-4 동점이 됐다.



이미 폰세를 쓸 타이밍을 놓친 한화는 6회 김서현을 구원 등판한 한승혁을 7회에도 올렸다. 그러나 한승혁은 구자욱과 디아즈를 몸에 맞는 공과 볼넷으로 내보내며 위기에 몰렸다. 김영웅 앞에 또 한 번 주자 2명의 밥상이 차려진 것. 투수를 바꿔야할 타이밍이었지만, 한화 벤치는 그대로 한승혁을 밀어붙였고, 결과는 또 하나의 ‘쓰리런 홈런’의 철퇴였다. 한승혁의 시속 145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이 밋밋하게 밀려들어온 것을 김영웅은 또 한 번 걷어올렸고, 또 한 번 우측담장을 훌쩍 넘겼다. 삼성의 7-4 역전. 이 한 방으로 이날 승부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표면적으로는 김영웅의 영웅적인 활약에 의한 삼성의 승리였지만, 파고들어보면 뒤를 보며 운영한 한화 벤치와 김경문 감독의 패착이 컸던 승부였다. 폰세, 와이스를 한국시리즈 1,2차전에 쓸 수 있겠다는 희망이 만든, 다소 느슨한 불펜 운영이 자신들에게 ‘철퇴’가 되어 돌아온 셈이다.


야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문현빈의 3점 홈런이 나오지 않고 경기가 1-0으로 이어졌다면 김경문 감독의 불펜 운용은 어땠을까. 6회에 올라온 투수가 황준서, 김서현이 아닌 폰세가 아니었을까. 물론 폰세가 올라와서 무조건 잘 던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김영웅에게 연타석 쓰리런 홈런을 맞고 패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오히려 문현빈의 내일을 보던 한화가 오늘만 살던 삼성에게 잡혔다. 두 팀의 플레이오프 승부는 이제 5차전으로 간다.
‘패장’ 김경문 감독은 경기 뒤 “오늘 경기 결과는 감독의 잘못이다. 디테일하게 얘기하긴 그렇지만, 내 잘못이다”라고 짧게 총평했다. 이어 “폰세는 8회에 등판시킬 생각이었다”라고 덧붙였다. 김서현의 활용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김경문 감독은 “결과론이지만, 김서현의 공이 나쁘진 않았다. 문동주만으론 5차전을 이길 수 없다. 5차전 9회 리드 상황이 오면 마무리 김서현을 올리겠다”라고 답했다. 충격적인 패배 때문이었을까. 김경문 감독은 “오늘은 이쯤하시죠”라며 서둘러 인터뷰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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