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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프리즘] 법의 좌표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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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0-22 22:47:21 수정 : 2025-10-22 22: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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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준 세운 역사 속 ‘10·22’
한국선 계엄령으로 기준 무너져
법이 눈감으면 국가가 길 잃어
정의의 낙하산을 펼 용기 있어야

어제, 즉 10월 22일은 이상한 날이다. 인류의 달력에서 이 날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기준’을 시험했다.

1797년 10월 22일, 프랑스의 가르네랭은 기구를 타고 1000m 상공에 오른 후 낙하산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뛰어내렸다. 그는 바람을 믿고 하늘에서 내려온 첫 인간이 되었다. 땅으로의 낙하는 공포였지만 그가 보여준 것은 도전의 질서였다. 두려움조차 법칙 안에 두자 인간은 처음으로 중력과 부력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관장

1884년 10월 22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국제 자오선 회의는 그리니치천문대를 지나는 한 줄의 경선을 0° 경선, 즉 본초자오선으로 정했다. 혼돈 속에서 합의된 이 결정은 세계 표준 시각, 표준 경도 체계의 기초가 되었고 오늘날의 세계화된 시간·지리 체계를 세웠다.

1962년 10월 22일, 존 F 케네디는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섰다. 냉전기 미·소 간 핵위기 정점으로 꼽히는 세계가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그 순간에 그는 전쟁 대신 말의 무게를 택했다. “우리는 핵의 문턱에 서 있다.” 그 연설 하나가 세계를 구했다.

10월 22일, 인류는 세 번의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했다. 도전의 질서, 시간의 기준, 책임의 언어로 말이다.

한국의 10월 22일은 달랐다. 1948년 10월 22일, 여수와 순천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국가가 처음으로 총구를 자국민에게 겨눈 날이었다. 제주 4·3의 불길이 채 꺼지기도 전이었다. 제14연대 병사들이 “동포에게 총을 쏠 수 없다”며 파병 명령을 거부하자 정부는 즉각 ‘반란’이라 명명했다. 순천 학구리에서 첫 교전이 벌어졌다. 그 뒤로는 총성과 침묵뿐이었다. 군은 마을을 불태웠고 법은 입을 닫았다. 누가 반란군이고 누가 민간인인지조차 구분되지 않았다.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 그것이 여순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은 그날을 말하지 않았다. 여수와 순천에 찍힌 ‘빨갱이 마을’이라는 낙인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기준이 무너진 자리엔 침묵이 세워졌다.

역사는 돌고 도는 법. 2024년 12월 3일, 또 다른 계엄의 그림자가 나라를 덮었다. 군이 시민 위에 섰고 그 위에 법관들은 눈을 감았다. 시민들은 맨손으로 군 지프차를 막았지만, 국회 증언대에 선 장성들은 계엄이 왜 불법인지조차 몰랐다.

이 와중에도 법관들은 여전히 침묵했다. 그제 국정감사장에 나온 법원장들마저 하나같이 비상계엄을 불법이라 말하지 못했다. 그들의 주저하는 입술을 보며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불법계엄이 성공했다면 이 사람들은 그날 국회 담을 넘고 계엄을 막으려 했던 국회의원들과 여의도에서 오로지 헌법 정신에만 기대어 맨손으로 계엄군을 막아섰던 시민들을 반국가세력이라 몰아 죽음으로 내몰지 않았을까. 이런 의심이 과한가?

역사는 언제나 그렇게 시작되지 않았던가. 법이 눈을 감을 때, 총은 말을 얻는다. 그리고 그 말은 언제나 ‘국가를 위한 조치’였다. 나는 묻고 싶다. 법관들이여, 당신들은 지금 어디에 시간을 맞추고 있는가. 세계는 1884년의 본초자오선을 기준으로 시계를 돌리지만, 한국의 사법은 아직도 어둠 속의 경도를 방황한다. 법이 눈을 감으면 국가의 자오선은 사라진다. 우리는 다시 길을 잃는다.

케네디의 연설은 전쟁의 문턱에서 법과 책임의 좌표를 잃지 않으려는 마지막 몸짓이었다. 그는 말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법관은 침묵의 무게를 모른다. 여순의 계엄과 12월의 불법계엄은 시대만 다를 뿐 하나의 같은 문장이다.

법은 누구를 지키는가? 하늘에서 뛰어내린 가르네랭은 낙하산을 펴며 말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는 내려간다.” 그의 하강은 공포가 아니라 신뢰였다. 법 또한 그래야 한다. 떨어지는 세상을 붙잡기 위해 내려가는 용기. 그게 정의의 낙하산이다.

2025년 10월 22일이 하루 지난 오늘, 우리는 다시 그 하늘 아래 서 있다. 법이 하늘이라면 지금 그 하늘은 찢겨 있다. 본초자오선이 시간을 잃고 낙하산의 줄이 끊어진 세상에서 시민만이 맨손으로 기준을 붙잡고 있다. 그 손을 놓는다면 역사는 또 다른 10월 22일을 기록할 것이다. 그날의 이름은 아마도 ‘법이 무너진 날’일 것이다.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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