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생사일여의 전장에서도 빛난다”
‘민족불교의 3대 정신사(精神史)’는 불교가 민족의 고난과 현실에 어떻게 응답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계보이다. 서산대사 휴정은 전란 속에서 수행을 전장으로 옮겨 호국의 불교를 세웠고, 용성스님은 산을 내려와 한글 경전과 사회개혁으로 민중 속에 불법을 심었으며, 만해 한용운은 시와 사상으로 식민의 억압 속에서 정신 해방의 불교를 완성했다. 하나같이 걸출한 세 선승(禪僧)의 삶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수행과 실천을 올곧게 이어갔던 한 줄기 국가수호의 맥이 시대를 넘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주>
수행과 독립을 한마음으로 꿰다
용성(龍城) 스님의 속명은 백상규(白相奎)로, 1864년 전북 장수군 번암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던 총명한 학동이었으니 세속을 벗어나 진리를 구하고자 14세 때 남원 교룡산성 덕밀암에서 출가했다. 이때 만난 동갑내기 벗 임동수는 평생의 신도이자 독립운동 후원 네트워크 구축에 중요한 동지가 되었다.

16세에 합천 해인사 극락암에서 화월 화상을 은사로 득도하고, 혜조 율사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이후 고운사·보광사·통도사·해인사 등 여러 선원에서 간경(看經)과 선(禪) 수행에 전념했다. 23세 때 신라불교 초전법륜성지인 경북 구미 도개면 아도모례원에서 오도를 체험한 뒤, 14년간 전국을 순회하며 경전 연구와 선원에서 참선과 공부에 집중했다. 수행자로서의 성숙은 곧 교단과 사회를 향한 실천 에너지로 이어졌다.
선승과 국가적 사명
1906년 용성 스님은 해인사 고려대장경 목판 보수 불사를 주창하며 대중 앞에 나섰다. 그는 고종에게 “민심과 국운을 살리려면 팔만대장경 보수가 필요하다”고 설득했고, 황실 지원으로 2만 냥을 받아 보수 사업을 추진했다. 수행이 국가 재건의 상징적 자본으로 전환된 순간이었다.
1908년 중국 순례에서 고승들과 교류하며, 조선 전통 율맥을 설명하고 불법은 천하의 공유(共有)라 단호히 밝히며 중국 고승들을 압도했다. 한편, 임동수는 상하이 고려인삼 무역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수행과 실천은 용성 스님의 삶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민중 구제를 위해 불교 대중화가 필요함을 인식한 스님은 산을 내려와 1911년 서울 종로구 봉익동에 대각사를 창건하고 선회(禪會)와 포교를 시작했다. 당시 한용운과 국내외 정세를 논하며, 1912년부터 주요 인사들에게 독립운동 지원을 호소했으나 반응은 미미했다. 스님은 민족 단합과 종교 연대로 방향을 바꾸어 1918년 천도교 손병희와 독립선언 거사를 논의하며 태극기와 민족대표 ‘33인’ 상징성을 지지했다.
1919년 56세의 스님은 한용운·오세창과 비밀회동을 갖고 3.1만세운동을 점검했다.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뒤, 사람을 시켜 거사를 미리 일본 헌병대에 신고까지 해두었다. ‘지도자들이 잡혀가 고초를 겪어야 민중이 깨어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의 예견대로 3.1만세운동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체포된 스님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도 경전을 설하고 매일 좌선하며, 감옥을 또 하나의 선방으로 삼았다. 1921년 대각사를 재개원하고 ‘대각교’를 창건하며, 불경 한글 역경, 예식 간소화, 찬불가 보급, 어린이 포교 등 생활불교를 체계화했다. 대중 선원을 중심으로 일반 시민에게도 삼귀의와 오계를 전하며 근대 불교 대중화의 이정표를 세웠다.

항일 연대와 국제적 활동
용성 스님은 독립운동 기반을 경제와 교육으로 확장했다. 1922년 만주 연길에 대각교당과 과수농장 ‘과원’을 세워 선농일치(禪農一致) 공동체를 운영했고, 1927년 경남 함안에 ‘화과원(華果園)’을 조성해 선농불교를 주창했다.
1930년 용성 스님은 한용운 주선으로 윤봉길을 만나 불교의 계를 주고 활동자금을 지원했으며, 백범 김구에게 윤봉길을 소개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결했다. 윤봉길 의거 후 동아시아 여론이 급변하자 일제는 종교와 사상의 통제를 강화했다.
훗날 김구는 광복 후 귀국해 가장 먼저 대각사를 찾아 용성 스님의 영전에 참배하며, “용성 스님은 독립운동 자금을 계속 보내주셨다. 매헌 윤봉길을 상하이로 보내셨고, 그가 순국의 길을 걷게 한 것도 스님의 뜻이었다”며 스님의 헌신을 증언했다. 또한 “스님이 쌀가마에 돈을 넣어 만주로 보내주셨다”는 세세한 일화도 전했다. 자금의 배경에는 전라도 부호 임동수 집안과 순정효황후 및 황실 상궁들이 있었다.
스님은 1936년 일제의 대각교 해산에도 굴하지 않고 시야를 넓혀, 1938년 장제스와 마오쩌둥 측과 조선·중국 연합 항일전선을 구상했다. 1939년 일제 검거로 지하 조직은 와해되었으나, 스님은 제자들에게 “3천 명이라도 연합군에 참여하라”고 독려하며 조선의 독립을 위한 외교·조달·교육의 실천 의지를 멈추지 않았다.
용성 스님은 1905년 42세에 저술한 ‘선문요지(禪門要旨)’를 시작으로, 입적 때까지 우리말 화엄경 등 20여 종을 번역하고, 20여 종 어록을 남겼다. 스님의 이러한 저력은 수행·포교·독립운동이 결합된 ‘근대 불교 지도자의 상징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강대국 종속이 아닌 주인국되라”
1940년 임종이 가까워진 용성 스님은 범어사·내원사·해인사 등을 찾아 입적처를 구했으나, 탄압이 거세 머물 곳을 얻지 못했다. 결국 그해 2월 서울 대각사에서 앉은 채로 열반((坐脫入亡)에 들었다. 세수 77세, 법랍 61년이었다. 그의 유훈 10사 중 핵심은 간명하다. ‘사분오열의 과보를 반복하지 말라(국민통합)’와 ‘강대국 종속이 아닌 주인국의 주인이 되라(평화통일)’이다. 이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수행자의 언어로 응축된 대승적 평화윤리였다. 분열을 경계하고 자주와 공존을 설파한 용성 스님의 메시지는 해방과 분단, 냉전을 거친 오늘날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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