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고성발전 HRSG 입찰서
기술·가격 평가 기존 낙찰제 대신
‘발주사·업체 논의’ 새 방식 도입
“특정업체 밀어주기냐” 반발 제기
유찰·고가낙찰 진통… 사업 지연
분당 입찰도 기존 회귀서 또 번복
발전사 “고품질 설비로 더 효율적”
“예산 낭비·공정성 훼손… 개선 필요”
한국전력의 발전 자회사인 남동발전이 2000억원가량 되는 납품 계약을 사실상 주관적 평가에 좌우되는 방식으로 진행한 과정에서 불공정 논란이 일고 있다. 일각에서 ‘특정업체 밀어주기’ 의혹이 제기되고 거듭된 유찰로 사업이 지연되는 등 해당 사업을 둘러싼 진통이 상당하다.
19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남동발전은 2023년 10월 고성복합발전 배열회수보일러(HRSG) 입찰 방식으로 기존의 ‘종합낙찰제’ 대신 ‘경쟁적 대화에 의한 계약제’를 도입했다. 종합낙찰제는 기술 평가와 재무 구조, 사업 수행 능력 등 자격을 검증한 뒤 최저가 위주의 가격 경쟁으로 낙찰하는 것으로 복합발전소 기자재 입찰에 통용되고 있다.

‘경쟁 대화 방식’은 인공지능(AI) 등 최첨단 산업의 경우 기존 계약 방식이 시대 흐름을 반영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해 발주사와 업체가 대화?논의를 통해 평가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업계에선 발주사가 발전 용량과 효율, 안정성, 내구성 등 규격을 정해 놓는 발전 시장에 도입하는 건 조달청의 취지와 맞지 않다는 반발이 나왔다. 업계 관계자는 “3년 전 방식으로 지금 기술 수준을 평가하기 어려운 혁신 시장과 달리 HRSG는 기능과 기술이 이미 정립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동발전은 국내 발전사 중 최초로 2023년 고성복합발전 HRSG 입찰에 새 방식을 적용했다. 남동발전 측은 “과거에 저가 수주에 따른 공사 중단과 시공 품질저하 등 문제가 발생한 적이 있어 종합적으로 제작 역량을 검증하기 위해 도입했다”고 밝혔다.
HRSG 관련 업체 중 사업 이력과 자체 원천기술, 국내 공장 유무 등을 감안했을 때 사업 수행 역량이 있는 A사와 B사 두 곳이 뛰어들었다. 이후 정량평가(20점), 정성평가(65점), 가격평가(15점)로 배점을 구성한 남동발전의 세부 평가 항목에 B사가 문제를 제기했다. B사는 특히 ‘10년 내 납품 실적’이 있으면 불이익을 주지 않는 업계 관행과 달리, 남동발전의 정성평가 항목에 ‘5년 내 납품 실적’이 없을 경우 감점 요소가 되는 걸 문제삼았다. 두 업체 납기 실적을 보면 모두 최근 10년 이내는 실적이 있지만 5년 이내는 A사만 해당된다. B사는 재무 상태 평가항목의 점수 차이가 미미하게 설계된 것에도 A사에 유리한 조항이라고 문제 삼았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A사의 부채비율은 807.1%에 달한다. 68.2%에 불과한 B사와 크게 대조된다. 신용평가등급도 B사는 A+인 반면 A사는 BB 수준이다.
B사 측은 “A사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공정한 입찰 구조로 ‘들러리 서라’는 것밖에 안 된다”며 시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차해 버렸다. C사가 중도에 합류했으나 원천기술과 국내 공장이 없는 C사는 사전심사 과정에서 탈락했다.
그렇게 3차례나 유찰되면서 국가계약법상 2차례 유찰 시 진행할 수 있는 수의계약 조건을 충족하자 남동발전과 A사는 지난해 7월 수의계약 협상에 나섰지만 결렬됐다. 업계 관계자는 “단독 입찰 자격을 얻은 A사가 계약 금액을 올리고 납기도 연장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체결이 안 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남동발전은 “A사의 납기 연장 요구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금액 인상은 언급된 바 없다”고 했다.
4차례 유찰로 사업이 지연되자 남동발전의 요청으로 B사가 다시 입찰에 참여했지만 결국 A사에 낙찰됐다. 발주사 요구에 부응하지 못해 수의계약 자격을 잃었던 A사가 B사가 제시한 사업비보다 13억원 더 많은 1369억원에 계약을 따낸 것이다. 당시 심사위원 9명은 남동발전 측 사내위원 4명과 타지역발전사(4명)?대학교수(1명)로 꾸려졌다. 남동발전은 “국가계약법에 따른 위원 구성”이란 입장이지만 업계에선 “9명 중 8명이 사실상 ‘한 식구’나 다름없다”는 말도 나온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고성 HRSG 사업자 선정 기간이 평소보다 3∼4배 오래 걸리자 남동발전은 올 초 500억원대 분당복합발전 HRSG 입찰의 경우 기존처럼 종합낙찰제로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 8월 다시 주관적 평가가 가능한 ‘협상에 의한 계약’ 방식으로 변경하겠다며 말을 바꿔 논란을 자초했다. 남동발전은 “입찰 예정 회사의 변경 요청이 있어 공정한 평가를 위해 항목 일부를 조정한 것”이라고 했지만 업계에선 고성 HRSG 사례처럼 석연치 않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남동발전은 “사업 예산 내에서 일정 금액이 증가되더라도 발전소 수명 기간이 30년인 점을 감안하면 고품질 설비를 통한 운영비용 절감 효과가 커 비용효율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강득구 의원은 “협상에 의한 방식은 현재 폐쇄 단계에 있는 과거 석탄발전소 기자재 입찰에 적용된 적 있을 뿐 천연가스를 사용하는 ‘복합화력’발전소의 경우 최근 주요 입찰에서 고성 HRSG 건을 빼고는 모든 발전사가 종합낙찰제 방식을 채택했다”며 “한전과 발전자회사들의 부채 규모가 200조원이 넘는데 남동발전만 유독 불투명한 방식을 고수하는 것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온다”고 지적했다.
강 의원은 “공정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지켜야 할 공기업이 특정 업체에 유리하게 맞춤형 입찰을 해서 공정성을 훼손한 의혹이 짙다”며 “예산을 낭비하고 공공부문 윤리에서 어긋난 입찰 사례로 철저한 조사와 함께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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