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캄보디아 ‘로맨스스캠(연애빙자사기)’ 피해자 50대 김모씨는 16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믿었던 연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름도, 직업도, 가족사도 모두 조작된 가짜였다. 그가 받은 건 사랑이 아닌 정교하게 설계된 범죄 시나리오였다.
이 ‘로맨스스캠’ 조직의 총책은 강모(31)·안모(29)씨 부부. 이들은 지난해 3월부터 주부·노인·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100여명에게 투자하는 연인으로 접근했다. MBTI 맞추기부터 이모티콘으로 애정 표현까지, 10일치 대본을 만들어 상대방의 감정을 길들이는 감정 설계형 사기였다.
“우리 나중에 전원주택 지어서 살자.” 청각·언어장애 1급의 피해자 40대 최모씨는 모든 것이 가짜였던 연인과 미래까지 약속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500만원의 사기와 평생의 불신. 그는 “사기임을 알게된 뒤에도 계속 달래며 돈을 빼내려는 말에, 인간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 싶었다”고 했다.


사기 피해자들과 울산경찰청에 따르면 강씨 부부는 피해자들의 신상과 취향을 철저히 분석했다. SNS·오픈채팅·이메일을 통해 심리 상태를 파악하고, 맞춤형 인물 설정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호감의 언어와 공감의 타이밍을 훈련했고, 피해자의 반응까지 분석했다. 울산경찰청의 한 수사관은 “사랑을 흉기로 만든 조직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모은 돈은 가상화폐와 상품권 거래를 거쳐 세탁됐다. 피해금은 120억원. 많게는 8억8000만원을 잃은 피해자도 있다. 사기 과정에서 가짜 거래 앱과 조작된 수익 그래프를 보여주며 “버티면 수익률이 30%”라며 돈을 빼냈다.

강씨 부부는 올 초 캄보디아 경찰에 붙잡혔다. 하지만 5월쯤 현지 관계자에게 6000만원을 건네고 풀려났다. 도피 중에 이들은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쌍꺼풀·코 성형수술을 받고 외모를 바꾸기도 했다. 심지어 인터폴의 적색수배가 내려진 상태에서도 캄보디아 한국대사관을 직접 찾아가 여권 재발급을 시도했다. 피해자 50대 이모 씨는 “무효화된 여권을 재발급 받으러 왔었다고 들었다. 눈앞까지 왔는데도 못 잡는 현실이 너무 참담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현지 파견된 법무부 등 수사관들에 의해 다시 체포됐지만 송환 절차는 9개월째 제자리다. 현지 사법 절차가 불투명하고, 일부에서는 “캄보디아 내 반정부인사와의 교환 문제로 지연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피해자들은 대통령실·외교부·법무부·정당에 수 차례 탄원서를 냈지만 진전은 없다.

피해자 김씨는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에 잠시 안도했지만, 송환이 안 되니 지옥이 계속되는 기분”이라며 “8개월째 잠을 제대로 못 잔다”고 토로했다. 피해자 중 한 명은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다른 피해자들은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거나, 약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다. 피해자 홍모씨는 “국가기관들이 ‘절차상 문제’를 이유로 서로 책임을 미루는 사이 사기범은 도망칠 시간을 벌었다”면서 “이제는 말이 아닌 국가의 진심어린 관심과 조치로 이어지길 간절히 바란다”고 호소했다.
경찰은 강씨 부부 외 공범 36명을 구속송치했고, 그 중 7명은 최근 법원에서 징역 2~4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핵심 주범의 송환이 지연되면서 사건은 여전히 결말 없는 범죄로 남아 있다. 경찰 관계자는 “추가 범죄수익 은닉을 막기 위해 인터폴 블루노티스(은색수배)를 추가 발령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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