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염과 가을비. 2025 KBO 준플레이오프(준PO·5전3승제)를 관통하는 두 키워드다. 그리고 그 키워드는 3차전까지는 삼성에게 웃어주는 모양새다.
먼저 장염. 올 시즌 SSG 외인 에이스 드루 앤더슨은 준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장염을 앓았다. 장염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준PO 1차전 선발은 앤더슨이었다. 올 시즌 12승7패 평균자책점 2.25 탈삼진 245개로 코디 폰세(한화) 다음으로 위력적인 선발투수였던 앤더슨이었다. 그러나 앤더슨의 1차전 선발 등판이 불발되면서 SSG 이숭용 감독은 어쩔 수 없이 2선발 카드인 미치 화이트를 지난 9일 열린 1차전에 냈고, 화이트는 2이닝 만에 3실점(3자책)을 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앤더슨은 2차전이 비로 하루 순연돼 11일에 열렸음에도 등판할 수 없는 몸 상태였고, SSG는 깜짝 카드로 좌완 신예 김건우를 냈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여섯 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아내는 등 3회까지는 퍼펙트로 막아냈으나 4회부터 구위가 눈에 띄게 떨어진 모습을 보이며 3피안타 2실점을 내주며 3.1이닝 만에 마운드를 내려갔다. 9회말 김성욱의 끝내기 솔로포 덕에 시리즈를 원점으로 돌리긴 했지만, SSG로선 1,2차전 선발투수가 도합 5.1이닝만 소화한 게 찝찝함으로 남았다. 제 아무리 최강 불펜을 자랑하는 SSG라고 해도 12.2이닝이나 불펜이 소화했다는 것은 남은 준PO는 물론 PO에 올라가더라도 부담이 되는 수치였다. 그래서 3차전에야 모습을 드러낸 앤더슨이 최대한 이닝을 끌어주는 게 필요했다.

그러나 이숭용 감독은 “완벽하게 회복했다”던 말과는 달리 앤더슨의 몸 상태는 100%가 아니었다. 올 시즌 포심 패스트볼의 평균 구속이 152km였던 앤더슨. 최고 구속은 155km를 훌쩍 넘기며 힘으로 윽박지르는 전형적인 파워피처 유형의 그지만, 이날은 포심 패스트볼 최고 구속이 시즌 평균에 못 미치는 151km였고, 대부분은 140km대에 형성됐다. 자연히 슬라이더나 커브 등 변화구 구사 비율이 높아졌고(이날 앤더슨 49구 중 30구가 변화구), 이는 곧 삼성 타자들의 타깃이 됐다. 2회까진 여섯 타자를 깔끔하게 막아낸 앤더슨이었지만, 3회 1사 후 강민호에게 볼넷, 류지혁에게 안타를 맞더니 2사 1,3루에서 김성윤의 내야안타성 타구를 2루수 안상현이 악송구를 저지르면서 발빠른 1루 주자 김지찬이 홈까지 내달렸다. 3루 주루코치 이종욱 코치의 과감한 사인이 빛을 발했다. 흔들린 앤더슨은 이번 시리즈에서 타격감이 바닥을 찍고 있던 구자욱에게 적시 2루타를 맞으며 실점이 3점까지 늘어났다. 결국 SSG는 4회부터 마운드에 전영준을 올리며 또 한번 선발투수가 조기강판했다.

앤더슨이 장염 여파를 이겨내지 못한 것과 더불어 이날 1회말부터 갑자기 세차게 내린 비도 그의 투구에 큰 영향을 줬다. 몸 상태가 100%가 아닌 상황에서 37분이나 지연된 경기는 앤더슨의 투구 리듬에 큰 영향을 줬을 게 분명했다.
물론 이 가을비는 앤더슨과 맞대결을 펼친 삼성 원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긴 했지만, 원태인은 이미 지난 시즌 한국시리즈와 올 가을 NC와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비로 인한 변수를 극복해낸 예가 있었다. 거기에서 이날 승부는 갈린 셈이다.

앤더슨이 3이닝 만에 조기강판 당한 것과 달리 원태인은 가을비의 심술을 이겨내며 6.2이닝 105구, 5피안타 4사구 2개 5탈삼진 1실점의 역투로 삼성의 5-3 승리를 이끌어냈다.
원태인은 비가 내리자 실내 훈련장으로 이동해 스트레칭했고, 빗줄기가 잦아들어 경기 속행 가능성인 높아지자 외야에서 캐치볼 하는 등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덕분에 안타는 이따금 맞았지만, 산발처리하며 1실점으로 최대한 막아냈다. 6회까지 투구수가 90개에 달했지만, 원태인은 7회에도 마운드에 올라 2아웃을 잡아낸 뒤 마운드를 떠났다.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그를 향해 삼성 팬들은 기립박수로 환호했고, 원태인은 모자를 벗어 예를 다 했다. 가을에이스의 전형이었다.

원태인이 포스트시즌에서 가을비에 시달린 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지난해 KIA 타이거즈와 한국시리즈 1차전에 선발 출전해 5이닝 동안 66개의 적은 투구 수로 무실점 역투했으나 우천으로 서스펜디드 게임(suspended game·일시정지 경기)이 선언되면서 투구를 이어가지 못했다. 결국 삼성은 이튿날 남은 경기에서 역전패했고, 끝내 우승 트로피를 들지도 못했다.

원태인은 지난 7일 대구에서 열린 NC 다이노스와 와일드카드 결정전(WC) 2차전에서도 경기가 우천으로 45분간 지연 개시되면서 컨디션 조절에 난항을 겪었다. 그는 선발 등판 전 두 번이나 몸을 풀고 등판했다. 그러나 원태인은 해당 경기에서 106개의 공을 던지며 6이닝 4피안타 1볼넷 1사구 5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 팀의 3-0 승리를 이끌었다.


원태인은 3차전을 마친 뒤 “지난 경기에선 경기 전에 지연됐고, 오늘은 경기 시작 후 중단됐다. 오늘이 더 힘들었다”고 돌아봤다. 이어 “하늘이 원망스러웠지만, 지난해 KS 1차전의 아픔이 내게 큰 경험이 됐다. 지난해 경험으로 버틸 수 있었다”고 밝혔다.

준PO에서 자신의 역할을 모두 수행한 원태인은 일정상 준PO 남은 경기에 등판하기 어렵다. 삼성이 PO에 진출해야 선발 등판 기회를 잡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원태인은 “WC 1차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불펜 대기도 문제없다. 어떤 역할이든 맡겨만 주신다면 언제든지 나갈 것”이라고 의지를 불태웠다. 가을야구의 낭만을 아는 그는 “참 낭만적이지 않나”라며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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