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노동당 창건 80주년을 맞아 중국, 러시아 정부의 2인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심야 열병식을 10일 밤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지난달 중국 전승절 열병식을 계기로 드러냈던 북·중·러 연대를 재차 국제사회에 과시한 것이다.
반면 한국 경주에서 31일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 계기에 방한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박 2일의 매우 짧은 일정을 소화할 것으로 파악되면서, ‘외교 빅 이벤트’라는 기대감이 한풀 꺾였다.

◆2년여만에 열린 열병식…북·중·러 연대 재과시
북한은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 겸 통합러시아당 의장이 북한을 찾은 가운데 노동당 창건 80주년을 기념한 열병식을 개최했다.
북한이 열병식을 하는 건 2023년 9월 정권수립 75주년 계기 이후 2년여 만이다. 2020년 10월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부터 이번까지 5년간 진행된 열병식은 모두 야간에 진행됐다.
지난달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서 모인 북·중·러 3국이 약 한 달 만에 평양에서 다시 만나 반미, 반서방 연대를 다지는 자리였다.
특히 북한 조선노동당과 러시아 최대 정당 통합러시아당은 9일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북한의 “국방력 강화를 위해 취하는 조치들에 확고한 지지를 표시하였다”고 밝혔다. 북한의 핵개발을 용인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양측은 국제사회의 긴장이 고조되는 데 대해 “주권국가들에 대한 비법(불법)적인 내정간섭을 실현하려는 서방의 침략적인 정치” 때문이라면서 사실상 미국을 겨냥했다.
북한은 이번 열병식에서 북·중·러 연대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추후 이뤄질 수 있는 북·미 정상회담에서 목소리를 키울 여건 마련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두진호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유라시아센터장은 “러시아와 중국이 자국 서열 2위를 파견해 북·중·러 연대의 실질적 이행 의지를 보여줬다”며 “북한은 이들의 방북을 계기로 자신의 핵보유국 지위를 재확인하고 향후 개최될 수 있는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동맹국의 지지를 확보하려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국무위원장은 열병식에 참석한 또 럼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과 이날 만나 양국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키기로 합의했다. 이를 위해 당·국가·행정부·국회·지방 협력 채널을 통한 고위급 등 인적 교류를 확대하고 관련 분야 협력 가능성을 모색하기로 했다.

◆대남·대미 메시지는 빠져…새 ICBM 공개
김 위원장은 열병식 연설에서 직접적으로 한국이나 미국을 겨냥한 발언은 하지 않았다.
조선중앙신통신 11일 보도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무력을 강조했다.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주권을 사수하고 인민의 안전과 이익을 수호하는 것은 우리 군대가 걸머진 지상의 임무이고 절대의 사명”이라고 연설했다. 이어 “오직 힘으로써만, 승리로써만 지켜지고 담보될 수 있는 우리 주권과 우리 위업의 무궁함을 우리는 오늘 다시금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의지를 밝혔다.
김 위원장은 ‘반제국주의’도 강조했다. 그는 “우리당의 수범은 제국주의 연합세력의 반사회주의 책동에 강력한 저지선을 조성하고 세계 진보 역량의 연대연합에 적극적인 기여를 했다”고 연설했다. 이어 “새 세기에는 미제의 가중되는 핵전쟁 위협에 대처해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을 병진(나란히 진행)시키면서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도약기를 열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북한은 이번 열병식에서 새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20형을 공개했다. 최근 북한은 신형 대출력 고체엔진이 장착될 화성-20형을 개발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는 화성-17형을 공개했다.

◆트럼프의 짧은 APEC 방문…김 샌 정상회담
반면 에이펙 정상회의 개최에 따라 기대를 모았던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일정은 당초 예측보다 훨씬 짧은 당일치기 혹은 1박 2일 정도가 유력하게 관측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의장국을 맡는 에이펙 정상회의 본행사는 참석하지 않고 중국, 한국과의 정상회담만 각각 빠르게 진행하는 것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중, 한·미 정상회담을 한 뒤 국내 조선소를 둘러보는 일정까지 빠듯하게 소화하고 귀국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31일 에이펙 본행사에 불참할 경우 자칫 경주가 미·중 정상회담 무대로만 활용될 소지가 있다. 다자 회의보다 양자 회담을 선호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 자유무역 정신으로 만들어진 에이펙에 대한 거부감, 교착 상태인 한·미 관세협상 관련 한국을 압박하는 의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짧은 방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APEC에 참석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확인했다. 그는 10일 백악관에서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의 약값 인하 정책을 발표한 뒤 취재진으로부터 ‘시 주석과의 회담을 취소한 것이냐’는 질문에 “우리가 그것(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을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그곳(한국 APEC 정상회담)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아마 우리가 회담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며 중국과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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