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그냥 쉬었음’ 44만명 달해
양질 일자리 창출 기업 많아져야
노동시장의 경직성도 개선 시급
SK하이닉스 직원들이 웬만한 월급쟁이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지난해 기준 임직원 평균 연봉만 1억1700만원에 달하는 SK하이닉스가 얼마 전 노사 합의로 성과급을 평균 1억원씩 더 얹어줄 것으로 알려지면서다. 고대역폭메모리(HBM) 호황으로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거두고 있는 회사답게 성과급 보따리를 확 푼 것이다. 1억 연봉조차 언감생심이요 그림의 떡인 직장인들에겐 그야말로 꿈같은 얘기다.
물론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란 속담처럼 SK하이닉스의 돈 잔치에 속이 쓰린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오랫동안 동종업계 최강 자리를 유지하며 취업 준비생들의 선호도 단골 1위인 삼성전자의 직원들이 그런 듯하다. 삼성 노조가 SK하이닉스 사례를 거론하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성과급 제도 개선을 요구한 게 대표적이다. 젊은 직원 중 일부는 SK하이닉스 이직을 고심 중이란 소리까지 들린다.

하지만 이런 푸념마저 누군가에겐 사치다.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사회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백수 신세가 되거나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청년들에게 더욱 그렇다. 이들 대다수는 기업 규모를 떠나 어느 정도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 아등바등하고 있지만 절망하기 일쑤다. 취업문 자체가 비좁거나 문턱이 높아서다. 당장 올 하반기 대기업 신규(신입) 채용 계획만 봐도 바늘구멍과 다름없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최근 매출액 상위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121개사)의 62.8%가 하반기 신규채용 계획이 ‘없다’(24.8%)거나 ‘미정’(38.0%)이라고 답했다. 지난해 같은 조사 때(57.5%)보다 늘었다. 채용 계획을 세운 기업들조차 10곳 중 4곳(37.8%)은 지난해보다 채용 규모를 줄인다고 한다. 통계청의 ‘8월 고용동향’ 조사를 봐도 15∼29세 청년층 고용률은 45.1%로, 지난해 5월부터 16개월 연속 전년 동월 대비 하락세다.
이 외에도 일하고픈 청년들을 슬프게 하는 지표는 차고 넘친다. 예컨대 고용노동부가 집계한 지난달 구인 배수(구직자 1인당 일자리 수)는 0.44였다. 일자리를 찾는 100명 중 44명만 일할 데를 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수치는 지난해 동기(0.54)보다 떨어진 것으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8월(0.26) 이후 역대 8월 기준 최저다.
기업들이 갈수록 신입 대신 경력 채용으로 방향을 트는 것도 청년들을 암울하게 한다. 한국은행이 지난 2월 발간한 ‘경력직 채용 증가와 청년 고용’ 제목의 보고서를 보면, 기업의 신입직 채용 비중은 2009년 82.7%에서 2021년 62.4%로 떨어진 반면, 경력직 채용 비중은 같은 기간 17.3%에서 37.6%로 두 배 이상 높아졌다. 취업 등 경력 쌓는 기회 자체를 갖기 힘든 청년들로선 채용문을 두드리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 여당이 정년(60세→65세) 연장 법안을 추진하는 것에도 이들의 억장은 무너진다. 이렇다 보니 아예 일할 의지를 잃고 노동시장에서 이탈하는 청년도 많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구직 활동이나 일을 하지 않고 ‘그냥 쉬었다’는 청년층은 44만여명이나 됐다.
청년 백수를 양산하는 고용 한파 고착화는 심각한 문제다. 나라의 미래 성장 엔진이 녹슬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최근 삼성, SK, 현대차, LG 등 주요 대기업이 잇따라 대규모 신규채용 계획을 밝혀 반갑다. 다만 고용 여건이 나아져서가 아니라 이재명 대통령까지 나서 청년 채용을 당부한 대통령실 눈치를 본 것 같기도 해 달갑지만은 않다. 지속 가능성이 낮고 대기업 사원증을 쥘 수 있는 청년은 제한적이어서다. 결국 대·중·소기업 할 것 없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업체가 많아져야 한다. 그러려면 최소한 올바른 기업가정신을 갖춘 기업들이라도 경쟁력을 키우고 양껏 발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환경 조성이 시급하다. 이 대통령도 언급했지만 기업 채용을 주저하게 만드는 노동시장의 경직성 문제 역시 개선돼야 한다. 튼실한 사회 안전망 구축과 청년들이 마음껏 창의력과 꿈을 펼칠 수 있는 지원 방안이 절실한 것이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쉰’(맛이 간) 나라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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