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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카네기홀 무대에서 서는 바이올린 여제 정경화 “죽을 때까지 자신을 다 바쳐 음악에 매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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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9-21 09:00:00 수정 : 2025-09-20 23:35:48
박성준 선임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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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선 게 약 20번 정도 되는데, 이제는 그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진 못해요. 그래도 카네기홀에서 열린 레벤트리트 콩쿠르 본선 무대만큼은 잊을 수 없습니다.”
8년 만에 다시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 서며 한·미 순회 연주에 나서는 ‘바이올린 여제’ 정경화가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크레디아클래식클럽에서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바이올린 여제(女帝) 정경화(77). 1970∼80년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으로 국가 홍보영상에 자주 등장하던 ‘K-클래식’의 시원(始原)이다. 1967년 당대 최고 권위를 인정받던 에드거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공동 1위를 차지하며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전후 최빈국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던 동양 소국에서 온 어린 여성에 대한 편견과 견제, 그리고 강력한 경쟁자를 오로지 실력으로 극복한 쾌거였다.

 

오랜만에 한·미 순회연주에 나서며 카네기홀에도 8년만에 다시 서는 정경화는 18일 서울 종로구 크레디아클래식클럽에서 기자들을 만나 모처럼 콩쿠르 때 기억을 소환했다. “그 무대에서 제가 품었던 꿈은 은실과 금실처럼 가늘고 아름다운 소리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카네기홀의 음향은 참 기가 막혔습니다. 아주 자연적인 소리가 났고, 작은 미세한 소리까지도 객석 끝까지 전달되더군요. 그런 훌륭한 홀에서 연주할 때 정말 행복했습니다.”

 

세계 주요 콘서트홀을 섭렵한 정경화는 또다른 꿈의 무대 빈 무지크페어라인과도 비교했다. “빈 무지크페어라인은 소리가 마치 벨벳처럼 곱게 퍼지는데, 카네기홀은 좀 더 현실적이에요. 제가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따라 홀에서 들리는 소리가 달라지는 곳이었죠.”

 

최고 권위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다지만 동양 빈국 출신 신출내기였던 정경화가 클래식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긴 건 1970년 런던 데뷔 공연이다. 앙드레 프레빈이 이끄는 런던심포니와 협연하기로 했던 이츠하크 펄먼이 아내 출산 때문에 공연 직전에 연주를 취소했다. 그 대타로 급하게 무대에 선 정경화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는 그야말로 역사적 명연으로 평가받는다. 정경화는 단숨에 연간 100회 이상 연주 스케줄이 잡히는 클래식 스타로 발돋음했다. 명문 음반사 데카의 제안으로 곧장 런던심포니와 녹음한 협연 앨범은 영국에서 ‘올해의 레코드’로 선정됐다. ‘현의 마녀, 정경화’가 세계 클래식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그 무렵에 대해서도 정경화는 이날 기억을 떠올렸는데, 그 각오가 사선(死線)에 선 무사를 방불케 했다.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고 나니, 10차례 정도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기회가 주어졌어요. 그때 저는 어느 콘서트에서든 공연이 끝나자마자 관객들이 기립박수(instant standing ovation)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립박수는 다시 초대받을 수 있는지를 결정짓는 하나의 기준처럼 여겨졌거든요. 그래서 당시에 연주를 마치기가 무섭게 청중들이 바로 일어서지 않으면 공연이 망쳤다고까지 여겼습니다. 덕분에 제 자신에게 늘 큰 압박이 있었죠. 그렇지만 그 시절 저는 매번 연주에 제 모든 것을 쏟아붓고 즐겼기 때문에 다행히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2017년 평창대관령음악제에서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을 연주중인 정경화.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후 정경화는 데카, EMI 등에서 수십 년에 걸쳐 여러 전설적 명반을 남기며 바이올린 여제로 군림했다. 클래식 매체 그라모폰은 2017년 명예의 전당에 정경화의 이름을 올렸고 2022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30인’에 정경화를 포함시켰다.

 

건강 문제 등으로 한동안 연주를 쉬었던 정경화는 오랜 음악적 동반자인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와 함께 9월 24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을 비롯해 평택, 고양, 통영에서 국내 투어를 진행한 뒤, 오는 11월 7일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오른다. 카네기홀 연주는 2017년 데뷔 50주년 기념 무대 이후 8년 만이다. 당시 그는 바흐 무반주 전곡을 하루에 연주하며 카네기홀 125년 역사에 기록을 남겼다. 이번 리사이틀에서 두 연주자는 슈만 바이올린 소나타 1번, 그리그 바이올린 소나타 3번,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를 연주한다. 모두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긴밀한 호흡이 요구되는 낭만주의 작품이다. 특히 프랑크 소나타는 정경화의 대표 레퍼토리다. 정경화는 “바이올린은 노래하는 악기다. 낭만주의 음악이 가장 아름다운 레퍼토리라 생각한다”며 이번 프로그램을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프랑크 소나타가 거의 저의 시그니처가 된 듯해요. 4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려놓은 그림 같아요. 젊었을 때의 열정적인 모습이 있고, 그 다음에 나오는 레치타티보(Recitativo) 악장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깊이 되돌아보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람은 50대, 60대가 되어서도 인생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많잖아요. 이 레치타티보 부분이 바로 그런 서로 간의 대화처럼 느껴져요. 하여튼 프랑크의 음악 자체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 같다고 볼 수 있죠. 올해 77살이 되어 돌아보니 제 인생은 제가 젊었을 때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르게 흘러왔더라고요. 그래서 때때로 그 삶이 연주에 반영되기도 하고, 제 나름대로 곡을 새롭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저는 아마 마지막까지도 이 프랑크 소나타를 연주할 것 같아요. 이 곡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아직 많거든요.”

1970년대 바이올린을 연주중인 정경화. 세계일보 자료사진

연주를 앞둔 정경화는 “무대에 올라가면 스스로 한계를 두지 않는다. ‘여기까지만 해야지’ 이런 건 있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첫 번째 음이 울려 퍼지는 순간이 출발점이고, 마지막 음을 끝맺을 때까지 관중들은 그 스토리에 온전히 빠져들게 됩니다. 특히 프랑크 소나타는 첫 음에서 마지막 음까지 듣는 분들이 ‘아, 인생이 이런 거구나’ 하고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올해로 데뷔 58년차인 여제는 바이올린을 시작한 다섯 살 때 연주자로서 운명을 직감했다고 한다. 수줍음 많은 성격이었지만 무대에 설 때는 두려움이 없었고 관객이 연주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서 ‘아, 이게 내가 가야 할 길인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10대에는 수줍음이 많았지만 무대에 올라갈 때면 제 안에 있는 불꽃(Fire)을 다 뿜어냈죠. 그렇게 연주를 하고 음악을 공부하는데 제가 접하는 세계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오히려 제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거예요. 그러다 스무 살 무렵 요제프 시게티 선생님께 배우는데 제 스스로가 멸치 같았어요. 아주 커다란 바다에서 쩔쩔매며 헤메는 작은 물고기라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울면서 공부를 했는지 몰라요. 하하하. 선생님 말씀대로 저는 테크닉을 철저히 연마해서, 바이올린만큼은 완벽하게 다뤄보자고 마음먹었어요. 물론 음악에는 완벽이 없지만, 바이올린 기술만큼은 될 수 있으면 완벽하게 하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그것만 해내기도 참 힘들었습니다.”

1967년 레벤트리트 콩쿠르 1위 후 데뷔 58주년을 맞은 바이올린 여제 정경화가 발표한 수많은 명반들. 자료=discogs.com

모처럼 기자들 앞에 선 정경화는 동생 정명훈이 라 스칼라 음악감독이 된 소감에 대해 “동생이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몸가짐이 겸손해진다. 한국 클래식 음악 역사에 큰 영광을 안겨준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K-클래식 원조 스타는 “시간이 갈수록 음악가의 삶이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다 바쳐 음악에 매달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40-50대쯤 된 분들은 젊었을 때 지금 같은 기술적 능력을 갖춘 연주자들이 이렇게 나올 거라고 상상도 못 했을 거예요. 저도 요즘 젊은 연주자들의 연주를 들어보면 ‘어쩌면 저렇게까지 할 수 있지’ 하고 놀랄 때가 많습니다. 제 바람이 있다면, 모두들 인내심을 가지고, 악기는 누구나 다룰 수 있게 된 이 시대에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좋겠어요. 그럼 이제 어느 분야에서건 한국을 따라올 나라가 없을 겁니다. 한국인의 재능과 역량이 그만큼 뛰어나니까요. 저도 항상 그 점을 마음 모아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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