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청(提請)이란 ‘어떤 안건을 제시하며 결정할 것을 청구한다’라는 의미다. 이를 인사(人事) 업무에 적용하면 ‘아무개를 어떤 자리에 임명해달라’고 인사권자에게 요구하는 행위가 되겠다. 우리 헌법은 국무총리, 감사원장, 그리고 대법원장에게 제청의 권한을 부여했다.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헌법 87조 1항), ‘감사위원은 감사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98조 3항),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104조 2항) 등 규정이 그렇다. 이 가운데 총리와 감사원장의 제청권은 허울뿐이라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대통령 쪽에서 먼저 ‘이 사람을 국무위원 또는 감사위원으로 제청해달라’는 취지로 요청하면, 총리나 감사원장은 이를 그대로 따르면서 제청하는 시늉만 낼 뿐이란 얘기다.

대법원장은 어떨까. 권부 핵심에서 은밀하게 이뤄지는 일이다 보니 대법관 제청의 실상이 외부에 공개된 적은 없다. 다만 민주화 이전 전두환정부 시절까지는 복수의 대법관 후보자 명단을 청와대에 올리면 대통령이 그중 한 명을 낙점하는 형태였다고 알려져 있다. 제청보다는 ‘추천’ 내지 ‘천거’에 더 가까웠던 셈이다. 6월 민주 항쟁의 결과로 1988년 노태우정부가 출범한 뒤로는 달라졌다는 후문이다. 노 대통령과 같은 해에 취임한 이일규 대법원장은 ‘대꼬챙이’로 불린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법관 후보자로 단수의 인물을 노 대통령 앞에 내밀었고, 결과적으로 이를 무리 없이 관철했다는 것이 사법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사실이라면 노 대통령이 크게 양보한 것 아닌가 싶다.
그 뒤 3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이 정치적 논란에 휩싸인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특정 대법관을 두고 ‘저 사람은 대통령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인사’라는 식의 소문은 끊임없이 나돌았다. 대체로 대법원장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가운데 어쩌다 대통령과 대법원장 간에 모종의 ‘타협’도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김명수 대법원장의 경우 후보자 시절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대법관 제청에 관해 “내 의지를 관철하겠다”며 “대통령이 추천하거나 원하는 인사가 적절하지 않으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해 화제가 됐다. 그가 6년 임기 동안 이 같은 소신을 100% 지켰는지는 오직 본인만이 알 것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조희대 대법원장의 낙마를 위해 총공세를 펴는 모양새다. ‘부적절한 모임에 참석했다’ ‘부당한 선거 개입을 시도했다’ 등 이유를 들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 결국 대법원장의 제청권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민주당은 대법관 숫자를 현행 14명에서 26명으로 증원하는 것이 목표다. 그런데 헌법 104조 2항에 따르면 대법관은 반드시 대법원장의 임명 제청을 거쳐야 한다. 조 대법원장은 후보자 시절 청문회에서 대법관 제청에 대해 “사법부 독립을 지키는 입장에서 헌법이 정한 대로 행사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처럼 깐깐한 조 대법원장을 내몰고 친(親)민주당 성향의 대법원장을 앉힌 뒤 현 정권과 ‘코드’가 맞는 법조인들을 일사천리로 제청해 늘어난 대법관 정원을 채우려는 것이 민주당 의도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저 기우(杞憂)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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