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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궁금해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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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9-18 22:53:04 수정 : 2025-09-18 22: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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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를 향한 무례한 질문들
그래도 조용히 살아가는 부부
우연히 구한 아이의 반복된 말
끌린 듯이 바닷가 마을을 간다

폴 윤 ‘크로머’(‘벌집과 꿀’에 수록, 서제인 옮김, 엘리)

폴 윤은 한국계 미국인이자 조부가 한국전쟁 때 탈북한 피난민인 영향으로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제에 더 집중하는 작가이다. 그의 소설은 읽는 소설이 아니라 음미하는 소설이며 보여주기가 아니라 나직한 소리로 들려주기에 가까워 보인다. 이런 소설일수록 짧은 단편이어도 천천히 읽어야 하며, 한 문장도 사소히 지나갈 수 없고 행간 사이의 숨은 뜻을 헤아려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 마음에 동요가 찾아올 것이다.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지금 떠오른 사람에게 연락해야겠다는. 제대로 된 어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하는 질문과 함께.

조경란 소설가

단편 ‘크로머’의 해리와 그레이스 부부가 사는 여기는 런던 남서부 뉴몰든. 1970년대 초에 탈북한 그들의 아버지들이 대규모 한인 공동체에서 새 삶을 시작한 곳이다.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낸 해리와 그레이스에게 결혼은 수순 같았다. 사십 대 중반인 그들은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데 서울에서 발행되는 잡지와 신문을 팔다가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는 스마트폰 케이스나 학생들이 쓰는 펜들, 탄산음료, 여름에는 빙수기를 들여놓곤 빙수도 판다. 해리는 가게에 오는 아이들 이름을 전부 기억하려고 애쓰고 아이들을 꺼리지 않지만 그레이스는 다르다. 아이들, 아니 부모가 하는 말을 들은 애들이 탈북자를 향한 무례한 질문을 거리낌 없이 해서.

어렵게 그들은 타인들의 폭력과 혐오를 견디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어린 해리 앞에서 한 남자가 아버지에게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거냐던 조롱은 잊지 못했지만. 꼭 그들의 아버지들처럼 “반쯤 죽은 듯이”. 이제 둘만 남아, 더 고립을 느낀 해리는 “모든 시간이 그들을 둘러싸고 고리 모양으로 굳어져 버린 것” 같다고 여기지만 무언가를 기다렸다. 무언가 “그 경계 밑을 파고들어 모습을 드러내 주기를”. 그러던 어느 가을밤, 후드를 뒤집어쓴 아이가 가게로 피신하듯 들어왔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얼굴에 피를 흘리면서.

경찰을 부르고 기억을 잃은 듯한 아이를 일깨워 엄마에게 전화를 연결해 주고, 병원에 데려가고, 아이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고. 그날 밤 해리와 그레이스는 아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걸 다했다. 아이는 누구에게 폭력을 당했는지, 왜 집을 나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아이가 유일하게 계속 반복한 말은 오직 ‘크로머’였다. 자신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 예전에 해리와 그레이스가 신혼여행을 갔던 바닷가 마을이었다. 아는 한국 사람이 그곳 호텔에서 일하고 있어 숙박비를 할인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해리는 종종 그 아이 생각을 했다. 기억을 찾았는지, 그 애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 아이 일이 “내면에 붙들려” 계속 궁금해졌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해가 바뀌었다. 겨울 비수기, 그레이스의 생일도 다가와 여행을 가기로 했다. 크로머. 거길 말한 사람은 그레이스였다. 아이들을 꺼리고, 폭력 앞에 쉽게 노출될까 봐 자신의 아이도 갖지 않기로 한 그녀가. 눈 내리는 해안 도시는 추웠고 호텔도 그랬다. 프런트 직원에게 고장 난 난방 이야기를 한 해리는 로비 밖, 해변 산책로 벤치에 후드 티셔츠를 입고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곤 밖으로 나간다. 그 아이일까?

더플백에 든 위조 시계와 담배 등을 팔며 벤치를 집으로 여기는 ‘아이’는 빛을 내는 물건을 플라스틱 총에 넣고 머리 위로 쏘아 보여주었다. 해변에서 해리는 “하늘로 솟아오른 빛나는 별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자신이 찾고 있는 아이 이야기를 했다. 헤어질 때 벤치의 아이가 약속했다. “아저씨네 아이는 제가 찾아볼게요.” 아이가 멀어졌고 멀어진 자리에서 또 하나의 별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순간 어쩌면 해리는 알았으리라. 폭력을 당한 아이, 길을 잃은 아이, 불완전한 환경에 놓인 그 아이에게 자신이 예전에 원했으나 갖지 못했고 만나지 못했던 어른이 돼 주고 싶어 했던 거라고. 방법도 올바른 길도 알지 못하지만, 그저 궁금해하는 마음으로 여기 먼 곳까지 찾아온 거라고.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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