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을 지나 선선한 바람이 감도는 가을 숲은 풍요로운 결실을 품고 있다. 이 계절 한라산 남쪽 돈내코 계곡의 상록수림을 살펴보면, 짙은 녹음 사이로 키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짙은 남색 열매를 맺고 있다. 바로 만년콩(Euchresta japonica)이다.
만년콩은 우리나라 콩과 식물 가운데 유일하게 사철 푸른 상록활엽수다. 키는 30∼60cm에 불과하고 줄기는 땅 가까이 비스듬히 뻗어 자란다. 잎은 세 장의 작은 잎이 모여 윤기 나는 녹색 겹잎을 이루며 잎 뒷면에는 흰 털이 나 있다.

6∼7월에 줄기 끝에 흰 꽃이 피고 나면 9∼11월에 열매를 품은 짙은 남색의 꼬투리가 달린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콩과 식물과 달리 다육질인 꼬투리 안에 단 하나의 씨앗만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만년콩은 한국, 중국 남부, 일본 남서부에만 분포하는 희귀종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제주 돈내코 계곡에서 열 그루도 채 되지 않는 개체만 확인되어 ‘멸종위기 야생생물 Ⅰ급’으로 보호받고 있다. 중국과 일본 역시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 제주 돈내코 계곡에서 이 식물을 처음 발견한 식물채집가 ‘김이만’을 기리고 사시사철 푸르른 상록수임을 담기 위해 ‘만년콩’이라 이름 붙였다.
만년콩이 가을 숲에서 열매를 맺듯, 우리에게도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희귀 식물을 무단 채취하지 않고 자생지에서 온전히 생장할 수 있도록 보전하는 일이다. 작은 관심과 배려가 모이면 멸종위기종도 살아남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 생물을 지켜낼 때 국제사회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올가을 숲에서 만년콩이 전하는 결실의 메시지를 되뇌어 보자. 그것은 단순한 열매가 아니라 천년만년 이어가야 할 생명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지연 국립생물자원관 환경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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