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불안감 커지는 연구결과
국민 건강지킬 안전망 부재
국내선 아직 문제인식도 부족
“멋져 보였다.” 이 이유로 기후대응이라는 커다란 판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 이 판에서 버티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각종 연구와 뉴스가 쏟아진다.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소화하기 급급한 나와 동료들을 발견한다. 작지만 값진 성과가 빛을 발휘하는 순간을 소소하게 만끽하다가도 어느 순간 공허함이 몰려온다.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데, 이게 정말 기후대응에 도움이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 때 즈음 공허함은 불안감으로 바뀐다. 친한 친구들과 술자리에 앉아도, 기후위기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무심코 감정을 억누른다. 이 감정이 ‘기후불안’이란 것을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는 말 그대로 기후위기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면서 발생하는 심리적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뜻한다.

정작 이 판에서 기후불안에 따른 정신건강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다. 공공연하게 기후불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이게 다 MZ세대(1980년대∼2000년대 초 출생)의 정신건강이 나약해서 그렇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그러나 기후불안은 존재한다. 랜싯 등 여러 의학 학술지에 일찍부터 관련 연구가 올라왔고, 기후과학 관련 국제기구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가 2022년 내놓은 제6차 종합보고서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기후불안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과 앤서니 파인스타인 교수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기후변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자 268명 중 절반 가까이가 중증 불안(48%)과 우울감(42%)을 호소했다. 그는 좋은 관계와 지지 네트워크가 강력한 보호 요인이 되므로, 기후대응에서도 감정 보호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대규모 조사가 진행된 적도 있다. 2023년 여름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이 국내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기후불안 실태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90.8%는 불안감을 느낀다고 답했다. 무력감을 느낀다고 답한 응답자도 전체 54.2%에 이르렀다. 특히 20∼30대의 경우 다른 세대보다 불안감 수치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후위기란 거대한 문제 앞에 젊은 세대는 더 큰 무력감에 갇혀 있다는 뜻이다.
기후불안을 겪는 것은 개인이 나약해서가 아닌 위기를 앞둔 인간의 당연한 반응이다. 그렇기에 개인이 해결해야 할 몫으로 떠넘길 것이 아니라 폭염에 그늘막을 세우듯 사회적으로 예방하고 돌봐야 할 기후적응의 한 부분이다.
문제는 이런 기후적응이 모든 정책에 반영돼야 한다는 말은 무성하지만, 정작 이를 실행할 책임을 가진 부처와 기관의 의무는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불안을 덜어낼 제도적 장치는 찾아보기 힘들다. 보사연은 기후변화와 건강을 직접 연결하는 정책 수립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의료보건계열 대학 내 기후변화와 건강 영향 관련 정규 수업은 드물고, 특강이나 세미나 형태로 기초 정보만 전달되는 수준에 그친다.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부재한 점도 문제다. 보사연은 최근 보고서에서 “일반인뿐만 아니라 전문가와 정책관계자도 과학적 근거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며 “각 당사자가 기후위기 정책에 대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이 부재하다”고 꼬집었다.
기후위기를 둘러싼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며 마음을 흔들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감정을 돌볼 수 있는 안전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후불안을 말하는 건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이 위기를 잘 버텨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중요한 것은 이를 숨기지 않고 동료와 나눌 수 있는 안전한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끝없는 기후위기의 이야기 속에서 마음의 지속가능성을 지켜내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함께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준비가 아닐까?
윤원섭 녹색전환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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