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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노동자의 성장통… “버겁고 잔인했던 시간”

입력 : 2025-09-01 20:19:46 수정 : 2025-09-01 21:53:12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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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학년 2학기’ 이란희 감독·4인 배우

고교 실습생 사망 사건 보며 서사 구상
2년간 현장 누비며 빈틈 없는 ‘설계’
부조리한 시스템에 끝없이 질문 던져

직업계고 출신 등 주연 대부분 신인
감독 추천 노동책 접하니 몰입도 ‘쑥’
BIFF 4관왕 등 작품성도 호평받아

직업계고 3학년 ‘창우’(유이하)는 친구 ‘우재’(양지운)와 함께 인천 남동공단의 한 중소기업으로 현장 실습을 나간다. 실습을 금세 포기한 우재와 달리 창우는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두 달의 실습을 마치고 정직원으로 채용되면, 내신 성적으로는 엄두도 못 낼 대학 진학이나 병역특례 기회가 생긴다. 창우는 그 희망을 붙들고 버틴다.

 

그의 눈에 점점 들어오는 이들이 있다. 한 해 먼저 도제 실습을 시작한 동갑내기 ‘에이스’ 실습생 ‘성민’(김성국), 또래들 사이 ‘레전드’로 불리는 유능한 20세 노동자 ‘수호’(유명조). 이들과의 만남은 창우의 세계를 점차 넓힌다.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영화 ‘3학년 2학기’를 연출한 이란희 감독과 주연 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현장 실습생 ‘다혜’ 역을 맡은 배우 김소완은 차기작 촬영 일정으로 인터뷰에 함께하지 못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란희 감독, 배우 유이하, 김성국, 유명조, 양지운. 최상수 기자

◆청소년 노동자, 가여운 희생자 아닌 ‘행동하는 주체’로

 

‘3학년 2학기’는 영화 ‘휴가’(2021)로 주목받은 이란희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이다. 전작에서 중년 남성 해고 노동자의 삶에 주목했던 그는 이번에는 직업계고 실습생들에게 카메라를 돌렸다. 영화는 노동 현장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인물의 성장을 이끄는 서사의 중심축으로 삼는다.

 

이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 4관왕, 서울독립영화제 3관왕 등 국내 주요 영화제를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놀라운 호연을 선보이며 시선을 사로잡은 신인 배우들의 활약이 특히 돋보였다.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이란희 감독과 배우 유이하, 양지운, 김성국, 유명조를 만났다.

 

이 감독이 청소년 노동자에게 주목하게 된 계기는 1996년 극단 활동 시절 접한 고(故) 문송면(1971∼1988)군의 사연이었다. 온도계 제조업체에서 일하다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그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무산됐고, 이후 극단 생활을 접고 직업계고에서 연극 수업을 하며 메모한 기록이 이번 작품의 씨앗이 됐다. 반복적으로 들려온 실습생 사고사 소식은, 그를 본격적인 영화 제작으로 이끌었다.

 

영화는 현장 실습 중 사망한 이들을 기억하되, 그 현장에 적응해가며 살아가는 아이들의 얼굴에 집중한다.. 이 감독은 “기존 매체에서 청소년 노동자는 주로 가여운 희생자로 존재하지만, 그들이 무언가를 ‘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영화는 용접 불꽃과 기계 소리가 가득 찬 공장에서 버티는 자와 떠나는 자, 부조리에 목소리를 내는 자와 침묵하는 자의 선택을 보여준다. 여기엔 선악의 구분이 없다. 온 나라가 들썩이는 수능일도 남의 나라 일처럼 느껴지는 공간. 고참 노동자든 햇병아리 실습생이든 모두가 위험이 일상인 시스템 속에서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갈 뿐이다.

 

주연 배우 대부분은 신인이다. 유이하와 김성국은 실제 직업계고 출신. 연기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지게차 조작을 배웠고, 유이하는 실제 용접을 익히기도 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2020)의 단역으로 연기를 시작한 유이하는 ‘내가 과연 주인공 깜냥이 될까’ 하는 두려움을 안고 오디션에 임했다. “단역 생활을 오래 했어요. 현장에서 늘 주연들을 멀리서 바라봤거든요. 지레 겁을 먹었던 것 같아요.”

 

첫 촬영일, 연기를 망친 그는 “감독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싶어서” 감독의 전작 ‘휴가’를 10번이나 반복해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 감독은 그런 유이하를 두고 ‘창우 그 자체’라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만난 직업계고 학생들 대부분이 ‘제가 뭐라고요’ 하며 자신을 낮추고 조심스러워하더라고요. 더디고, 미련해 보일 만큼 조심스럽고, 질문을 삼키는 사람. 바로 창우였어요.”

 

이 감독은 배우들에게 청소년 노동을 다룬 책들을 권하기도 했다. 현장 실습생·청년 노동자 당사자인 허태준 작가의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호밀밭), 청(소)년 노동자의 죽음을 다룬 은유 작가의 르포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등을 함께 읽으며 배우들은 영화에 빠르게 몰입했다.

 

◆“첫 노동의 잔인함, 우리 모두의 이야기”

 

시나리오 작업은 2년간의 방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이 감독은 2년여간 직업계고 학생·졸업생, 교사·취업지원관, 노조원, 교육청 관료·노무사 등을 만나며 대사를 다듬고 장면을 설계했다.

 

“실습생들을 두고 ‘폐급’, ‘폐급은 아닌데 느리다’, ‘에이스’ 같은 말을 하는 장면은 실제 현장에서 비일비재한 일이에요. 이런 디테일은 취재 없이 쓸 수 없어요. 상상만으로 썼던 1차 트리트먼트를 지금 보면 술 취해서 쓴 글 같아요.(웃음)”(이란희)

 

영화는 ‘노동을 통한 성장’이라는 드물고 귀한 서사를 건넨다. 누구도 지켜주지 못한 청년 노동자를 비추며, 이들이 겪는 시스템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부조리를 겪으면서도 말을 삼키던 실습생이 용기 내 이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는 순간, 관객들은 저마다의 첫 노동을 떠올리며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영화는 단지 특성화고 실습생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 감독은 “돌이켜보면 첫 노동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버겁고 잔인하다”며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시작했으니 모든 걸 감수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탓”이라고 지적했다.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영화는 유머를 놓치지 않는다. 입담 좋은 우재는 눈물짓던 관객에게 웃음을 안긴다. 우재를 연기한 양지운은 “울든 웃든, 모두가 자신의 3학년 2학기 시절을 떠올려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영화 후반, 창우가 지하철에서 승무원을 꿈꾸는 듯한 복장의 여고생들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 감독은 “직업계고 여학생의 이야기는 이번 영화에 충분히 담지 못했다는 아쉬움 때문에 넣은 장면”이라며 “다음 영화의 주제가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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