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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 만큼 깊은… 할머니의 ‘당당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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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8-05 20:04:46 수정 : 2025-08-05 21:57:49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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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라 시네프’ 韓 첫 1등상… 단편영화 ‘첫여름’ 6일 개봉

당찬 29세 감독 허가영
작고한 외할머니 연애담서 영감
작품의 빈칸을 배우가 찰떡 소화
우아하고 꼿꼿한 ‘영순’ 탄생했죠

열정파 75세 배우 허진
내 또래 이야기에 읽자마자 눈물
대쪽 같은 감독 뜻 꺾을 수 없어
하라는 대로 찍었더니 큰상 받아

“처음에 이 작품 (시나리오를) 보고 울었어요. 이 젊은 감독이 왜 우리 같은 노인을 위한 이야기를 썼을까 싶었죠. 저보다 훨씬 대단한 배우가 많은데도 허가영 감독은 저를 택했어요. 자라나는 새싹 같았고,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죠. 그런데 딱 대상을 받았죠.”(배우 허진)

 

“사실 제 시나리오에는 빈칸이 참 많아요. ‘영순’이라는 캐릭터와 허진 선생님이 만나면서 강한 화학작용이 일어났죠. 제가 쓴 대사 한 줄, 연출한 한 장면보다 선생님이 통과하신 시절, 주름과 몸짓 하나, 앉아계신 모양새 하나하나가 모여 영화가 완성됐습니다.”(감독 허가영)

 

허가영 감독(왼쪽부터), 허진.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 경쟁·비경쟁 부문에 단 한 편의 한국 장편영화도 초청되지 못한 가운데 전 세계 영화학교 학생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라 시네프’(La Cinef) 부문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1등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허가영 감독의 단편영화 ‘첫여름’이 6일 메가박스에서 개봉한다. 단편영화가 단독으로 개봉하는 건 이례적인 일. 러닝타임은 31분, 티켓 가격은 단돈 3000원이다.

 

영화는 손녀의 결혼식 날과 겹친 남자친구 ‘학수’의 49재에 가겠다는 여자 ‘영순’(허진 분)의 이야기를 그린다. 개봉을 앞두고 지난 2일 서울 광진구 메가박스 구의 이스트폴에서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29세 감독과 75세 주연 배우는 서로에게 공을 돌리며 유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영화에서 영순은 결혼식을 앞둔 손녀에게 란제리 세트를 선물하며 말한다. “남자는 자고로, 너 즐겁게 해주는 남자가 최고야.” 가부장의 거대한 그늘에 숨죽이고 평생을 살며 노인이 됐지만 그는 여전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당당히 말하는 여자다. 그는 또 말한다. “나는, 음악 소리만 나오면 춤추고 싶어. 성미가 그래. 막 춤춰야 돼. 신나. 난 그렇게 살 거야.”

 

영순은 허 감독의 외할머니에 뿌리를 둔 인물이다. 대학생 시절, 할머니가 들려준 남자친구 이야기는 다섯 시간 넘는 대화로 이어졌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친구와 나누는 연애담처럼 들리기도,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남은 여성의 영웅담 같기도 했다. 자신을 혐오하고 연민하면서도 살아가려는 움직임, 춤을 출 때 가장 자신다워진다며 꿈꾸듯 말하던 할머니의 얼굴이 허 감독의 마음에 깊게 남았다.

 

“이전까지 할머니를 얼마나 납작하고 일반화된 노인으로 바라봤는지 그때 깨달았어요.” 몇 해가 지나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감독은 49재를 지내던 날 불경 소리가 마치 카바레 음악 소리처럼 들렸다고 한다. 거기서 영화가 시작했다.

 

허가영 감독 단편영화 ‘첫여름’ 한 장면.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제공

1971년 데뷔한 허진은 20대에 TBC 최우수연기상을 거머쥔 그 시절의 스타였다. 신상옥(1926∼2006) 감독의 영화 ‘여수 407호’에 출연 중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있자 그 길로 촬영장을 이탈해 버릴 만큼 당당한 성격이었다. 이런 사건들이 계기가 되어 한동안 그의 얼굴을 방송계에서 볼 수 없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그 시절을 돌아보며 “연기는 잘하지만 못된 배우로 인식됐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허가영을 두고서는 “이 조그마한 감독이 저한테 안 지더라”라며 혀를 내둘렀다. “어떤 대사는 진짜 못하겠다고 했는데, 감독님은 ‘해 주세요, 선생님. 이거 하셔야 합니다’ 하더라고요. 대단하더군요. 그래서 했어요. 연기자는 결국 감독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거든요. 안 하면 자격이 없는 거죠.” 허진은 이렇게 덧붙였다. “이 감독, 양보가 없어요. 그 기질 때문에 감독이 되었는가 봐요.”

 

원래 시나리오 속 영순은 조금 더 주책맞고 억척스러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허 감독은 허진과 함께 시나리오를 한 줄 한 줄 검토하며 대사를 다듬었다. 성애를 노골적으로 암시한 대사는 허진의 의견을 따라 완곡하게 수정하기도 했다. 보다 우아하고 꼿꼿한 영순이 탄생한 배경이다. “선생님의 말투와 언어를 반영했어요. 20대 여성인 제가 보지 못한 시선과 표현들을 선생님께 기대어 제 것으로 만들려고 했죠.”

 

지난달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선공개된 이 작품은 매진 행렬을 기록했다. “영화를 준비할 때는 ‘노인을 관찰하는 영화를 누가 보고 싶어 하겠냐’는 말을 듣곤 했어요. 이 영화가 세상에 나와 사랑받을 수 있을까 두려웠죠. 그런데 놀랍게도 세대를 불문하고 많은 분이 감상을 들려주셨어요. 창작자로서 제가 왜 존재하는지 확인하게 됐습니다.”(허가영)

 

이어 노배우가 말했다. “늙어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허 감독이 그 이야기를 아름답게 승화해서 여우처럼 잘 만들었어요. 허씨 여자들 고집이 원래 대단해요. 이분을 잘 지켜보세요. 앞으로 뭐가 나와도 나올 겁니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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