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평생 어머니 곁 지킨 정씨
“차라리 수술 중 돌아가셨으면”
지친 나머지 툭 내뱉은 한 마디
나 자신이 너무 밉고 부끄러워
간호사의 길 택해 지금도 간병
2007년 4월의 어느 날이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은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뀐 날이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는 18살이었고, 우리 엄마는 겨우 43살이었다. 그리고 그날,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로부터 어느덧 1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엄마가 쓰러졌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랜 세월을 병원에 의지하며 살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는 급성기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계셨고, 이후 상태가 악화돼 다른 지역의 대학병원과 또 다른 급성기 병원을 전전했다. 급성기 병원은 중증 환자를 집중 치료하기 위한 의료기관이다. 그 후 엄마는 집에서, 요양원에서, 지금의 요양병원에서 치료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생이던 시절부터 엄마를 간병해왔다. 오빠와 동생도 함께했지만, 두 사람 모두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엄마의 간병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24시간, 365일 계속되는 간병은 어린 나에게 너무도 큰 짐이었다. 지치고 힘든 나머지, 나도 모르게 간병에 소홀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자기 합리화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버티는 날들이 많았다. 간병 생활로 나는 허리 통증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특히 불면증은 나를 더욱 지치게 하고, 때로는 미치게 만들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 절절하게 실감했다. 한 번은 회복 중인 엄마에게 자식으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왜 살아 있냐. 차라리 수술 도중 돌아가셨다면… 지금쯤 나는 좀 편했을 텐데….”
그 말을 한 내 자신이 너무도 밉고 부끄럽다. 한편으로 다행인 걸까. 엄마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긴 치료 끝에 신체 마비와 함께 퇴행성 치매 증상까지 나타났고, 지금은 4, 5살 아이의 지능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간병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사람을 고갈시킨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를 괴롭힌 건 바로 간병비이다. 24시간 간병비는 하루 15만~20만원, 한 달이면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결국 나는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처음 엄마를 요양원에 보낼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금전적 부담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요양원은 장기요양보험을 통해 간병비 전액이 지원되기 때문이다.
엄마에 대한 속죄의 마음으로 나는 간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지금은 내가 근무하는 요양병원으로 엄마를 모셔 치료를 이어가고 있다. 요양원에 비해 요양병원은 간병인들의 관리나 교육이 체계적이라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요양병원에서는 간병비 전액을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여러 명이 함께 쓰는 다인실이라 해도, 1인당 하루 3만원꼴로 한 달이면 90만원, 1년이면 1000만원이 넘는 돈이 든다. 이런 현실을 마주하면, 연애와 결혼은 나에겐 사치처럼 느껴진다.
예전엔 이런 일이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안다. 누구에게나 갑자기 닥칠 수 있는 일이란 걸. 가족 중 한 명이 쓰러졌다고 해서 그 가족 전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우리 사회에는 튼튼한 안전망이 필요하다. 간병은 더 이상 개인의 희생으로 감당할 일이 아니다. 이제는 정부와 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몫이다. 간병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제도적 지원이 절실하다. 쓰러지기 전, 또박또박 내 이름을 불러주던 엄마의 목소리가, 18년이 지난 지금 너무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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