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대 족보’는 의대 각 과목의 기출 문제나 주요 필기 내용 10여년 치를 묶어 놓은 자료를 말한다.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공유한다. 의대는 한 학기에 공부해야 할 수업 자료만 수만 쪽에 달할 정도로, 다른 과들에 비해 학습량이 많기로 유명하다. 족보 없이 혼자 공부하면 F 학점을 맞고 유급당하기 십상이다. 의대에서 ‘왕족’(족보가 왕) ‘족생족사’(족보에 살고 죽는다)라는 말이 통용되는 이유다.
의대의 족보 문화는 1년4개월을 넘긴 의·정 갈등에서 의대생들의 학교 복귀를 막는 큰 요인이었다. 학생회나 선배들이 공유하는 족보가 개별 과목 시험과 의사 국가고시 통과의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족보 제공권을 쥔 의대 학생회나 지도부가 의대생의 생살여탈권을 가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짧게는 의대 6년, 길게는 인턴·전공의까지 10년 이상 단체 생활하는 폐쇄적 문화라서 한 번 찍히면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어려워 개별 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동안 족보 관리 주체는 학교별로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의·정 갈등 국면에서 학생회가 대부분 이를 관리하면서 수업 복귀 희망 학생들에게는 족보를 제공하지 않는 사례가 빚어졌다. 서울의 한 의대 학생회 TF는 지난해 5월 “수업 집단 거부에 참여하지 않으면 족보를 공유하지 않고 족보 접근권도 영구 제한하겠다”고 협박해 경찰 수사까지 받았다.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복귀하고 싶어도 이런 이유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대통령실과 국무총리실이 작년부터 교육부에 족보 등을 제공하는 대학별 의대 교육 지원센터 설치를 요청했겠나.
마침내 정부와 대학이 의대에 만연한 족보 문화를 손보기로 했다. 교육부가 지난 9일 확정한 ‘의대 교육혁신 지원사업 기본계획’에 ‘문제은행 플랫폼 구축 등 학생에 대한 학습·평가 지원 강화’안이 포함됐다. 교육부가 의대 시험 문제은행을 구축해 각 과목에 대한 시험 문제를 대학에 제공하고, 대신 대학은 기출 문제 대신 문제은행을 활용하는 것이다. 업무량이 과다한 의대 교수들의 출제 부담을 줄여 주고, 족보 문화도 없앨 수 있는 묘안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의료계에선 찬반 논란이 한창이다. 족보 문화 관행이 깨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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