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하는 부사 덧붙여야만
진심이 전달될거라고 착각
과하면 되레 공허하게 들려
이규리 시인이 이달에 나온 자신의 신작시집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를 보내주셨다. 지하철 안에 서서 아홉 편쯤 읽다 보니 나온 시 ‘부추 생각’의 도입부이다.

졸졸 부추 화분에 부어주네
부추의 화답은 끝이 가늘게 흔들리는 일부터
약함을 신뢰하는 일까지
무얼 대적할 수 없는 이 세필이 자랑스러워
사는 방법에 골똘해지고
세상에 폭력이 가능할까를 생각하네
유행 타지 않는 고전 좋아하기, 대적하지 않는 약함을 신뢰하기, 사는 일에 골똘해지기, 힘이 들어가려 할 때도 힘 빼기, 이런 태도는 화자가 나이 들어가는 증거일까?
어떤 분이 지하철 임산부석에 분이 앉으셨다. 일흔 살 정도? 예전 같으면 속으로 욕했을 텐데, 오죽 힘겨우면 저럴까 싶다. 나도 나이가 드니 대적하려는 기운이 떨어지며 만사 이해하고자 애쓰는 쪽으로 마음의 세필이 기운다. 다만 저렇게 후안무치한 노인은 되지 말라고 나 자신에게 경고한다.
“그래, 나도 그 집 너무 좋아해! 피자도 진짜 맛있어.” 옆 청년이 저녁 약속 잡는지 작은 소리로 통화한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너무’ ‘진짜’ ‘정말’이 들어가는 책 제목이 무수히 떠오른다. 저 부사는 용언의 의미를 강조하지만 과하게 쓰면 공허하고 미심쩍게 들리는데, 나이 먹은 나도 그 말을 덧붙여야 진심이 전달될 거라고 착각하곤 한다.
경치가 너무 좋아, 비빔밥 너무 맛있어, 정말 고마워, 정말 정원을 잘 가꾸셨네요. 진짜 차가 멋지네요, 진짜 수염이 잘 어울리네요, 진짜 시를 잘 쓰시네요. 그 영화에는 이런 투의 대사가 넘쳐났다. 오랜만에 간 극장에서 본 영화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했어’가 그랬다. 홍상수 감독이 의도적으로 현시대 사람들의 소통 방식을 풍자한 것이겠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씁쓰름한 사탕을 입에 물고 있는 기분이었다.
“가짜 꿀이 아닙니다. 제가 직접 양봉한 거예요. 선물이니 받아주세요.” 올봄 임고서원에 가서 특강을 했는데 마치고 나서 어떤 시인이 나에게 커다란 꿀병을 건네주셨다. 나의 시 ‘달에서 더 멀리’를 언급하시며 꿀을 주방 바닥에 쏟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날 질의응답 시간에는 ‘어떻게 하면 시인이 될 수 있냐’는 질문도 받았다. “지금 선생님은 시인이십니다”라고 나는 답변했다. 시를 사랑하고 시를 읽고 쓰며 지금 이 늦은 저녁에 시 창작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이 시인이 아니면 누가 시인이겠냐고 덧붙였다. 굳이 말하지 않았던 건 ‘예술인증명서’에 관한 것. 공공기관의 창작지원금, 예술인패스, 예술인생활안정자금 융자 등을 신청하려면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을 통해 예술인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한다. 저서를 5권 이상 발간해야 문학작가로 인정해 주는 거로 알고 있다. 신춘문예 및 문예공모를 통해 창작 활동 중인 작가가 아니어도 개인창작집 발간 작가라면 레지던스를 제공하는 국내 창작촌에 입주 신청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등단제도의 통과 여부로 진짜 작가 혹은 가짜 작가로 분할하는 얼토당토않은 관례는 더 이상 없다. 예술가는 예술인증명서 소지 여부로 예술가를 판단하지 않는다.
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 ‘진짜 대한민국’이라는 슬로건을 보았을 때 건성건성 넘어가기 어려웠다. 길고 긴 내란 상황에 분노했고 싸웠고 지쳐가면서도 현 상황을 시뮬라시옹의 반영이라고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짜/가짜, 지방/중심, 여자/남자 등 이분법적 도식이 있다면 이번 정권의 참신한 개방성, 다양성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김이듬 시인·서울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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