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세계타워] ‘공직자의 표상’ 정몽주

관련이슈 세계타워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25-06-18 22:51:01 수정 : 2025-06-18 22:51:00

인쇄 메일 url 공유 - +

말 아닌 행동으로 실천… 李정부도 초심 이어가길

이것은 옛이야기다.

14세기 말 여말선초(麗末鮮初)에 등장하는 정몽주는 충신(忠臣)의 대명사다. 이성계는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에 “사약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라며 크게 화냈고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다.

이도형 정치부 기자

의아한 점이 있다. 고려의 군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대항하는 이들을 가차 없이 제거했다. 그런 그가 고려를 지키겠다며 자신에 반기를 든 정몽주에만 무른 태도를 보였다. 왜였을까. 정몽주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정몽주는 지방 향리 아들로 연줄 없이 실력만으로 승진했다. 성리학에 밝았고, 행정과 외교에 능했다.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국가의 문제점을 개혁하는 데도 앞장섰다. 훗날 조선 왕조가 추진한 개혁 정책 중엔 정몽주의 구상이 씨앗이 된 것이 적잖다.

정몽주는 ‘말’보다 ‘행동’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스타일이었다. 1372년 명나라에 파견된 정몽주는 서해를 건너던 중 폭풍우를 만나 13일간 표류한다. 그는 말안장을 씹어 먹으며 버텼다. 침몰 소식을 들은 명나라 황제 주원장(홍무제)은 사람을 풀어 정몽주를 찾은 뒤 고려로 돌려보낸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런 일을 겪으면 평생 바다를 멀리한다. 그는 다시 나아간다. 1377년 정몽주에게 원한을 품은 높은 관리가 무리한 조건을 성사시키라며 정몽주를 일본으로 보냈다. 죽으라고 보낸 길이었다. 정몽주는 일본을 설득해 협상을 성사하는 업적을 만든다. 귀환하던 정몽주는 노예로 끌려가던 고려 사람들을 발견하고 자기 재산을 털어 이들을 구해냈다. 복귀 후엔 다른 고위 관리들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해 더 많은 사람을 고국으로 데려왔다.

1384년 정몽주는 명나라행 사신에 다시 뽑힌다. 12년 전 표류한 바닷길로 가는 여정이었다. 평소 일정 90일보다 한 달 가까이 모자란 60일가량만이 남은 때였다. 정작 정몽주는 50일 만에 남경에 도착했다. 바다를 건너는 중 뭔가 위험한 행위를 해서 일정을 단축했을 가능성이 크다.

홍무제는 외교문서에 적힌 작성일자를 보고 ‘위험한 행위’를 눈치챘다. 홍무제는 “분명 아무도 오지 않으려다 날이 임박하자 자네를 보낸 것이군. 자네는 12년 전 바다에서 표류하지 않았나”라고 물었다. 기록은 ‘정몽주가 그렇다고 답하자 주원장이 특별히 위로했으며 고려 측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썼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얻은 신뢰였다. 그래서 이성계도 정몽주에겐 약했다.

주말 동안, 고려사 정몽주 열전을 읽었다. 계기는 이재명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5일 첫 국무회의에서 윤석열정부 출신 장관들에게 “우리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업무를 하는 대리인이니, 공직에 있는 기간만큼은 각자 최선을 다하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말’을 듣자 왠지 행동으로 책임을 다한 600년 전 공직자의 삶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책을 펼쳤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행동’이다. 이 대통령은 선거 유세 때 ‘공복론’과 ‘실용주의’를 거듭 펼쳤고, 취임 2주차까지는 그 추이를 이어가고 있다.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 대통령이, 이 정부의 공직자들이 말뿐이었다고 5년 뒤에 말하고 싶지 않다. 이 대통령 스스로, 아니 이재명정부의 모든 공직자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신을 증명했으면 한다. 정몽주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명확하다. 이것은 옛이야기다. 그리고 지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도형 정치부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이주빈 '신비로운 매력'
  • 이주빈 '신비로운 매력'
  • 한지민 '빛나는 여신'
  • 채수빈 '여신 미모'
  • 아일릿 원희 '여신 미모'